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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08. 2022

사랑은, 너의 좋음을 기꺼이 함께 하는 것

  이른 아침, 전화가 왔다.    

 

  “딸, 어떻게 지내?”

  “그냥 그래요. 엄마는 별일 없죠?”

  “별일은 없지. 근데 이것저것 하느라 분주하네. 근데 애들 못 본 지 오래됐다~”

  “엄마... 지난주에 봤잖아요...”     


   20분 거리의 옆 옆 옆... 동네쯤 사는 엄마는 가끔 이렇게 안부를 묻는다. 대략 일주일. 손주들을 못 본 지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 뭐해요?”

  “오늘... 내일 할 거 준비 좀 해놓고... 놀러 올래?”

  “바쁘면 나중에 가고요.”


  “그 정도는 된다~”     


  핸드폰 넘어 들뜬 기분이 전해졌다. 손주들 볼 생각에 반가우신 게다. 분명 며칠 잠을 미뤄가며 바쁜 일이 있으셨을 터인데 못다 한 일들과 피로감은 뒷켠으로 물려버리신 게 분명했다. 제법 따뜻해진 볕과 곧 떨어져 버릴 봄꽃을 핑계 삼아 엄마 집 인근 강가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엄마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지라, 어려서 소 몰고 뒷산에 풀 먹이며 일찍이 이런저런 야생화와 잡초에 관심이 남달랐던지라, 엄마는 자연스레 약용식물과 식용 꽃에 애정을 가졌고 자녀들이 분가를 하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는 평생교육원에서 약용식물 강의와 사이버대학교 한방학과 학사전공을 병행하고 계신다. 식물이라 함은 무엇이든 손만 대면 죽이는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나와 달리, 엄마는 이름 모를 잡초 하나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마냥 잡풀인 줄 알았던 잡초 같은 것들도 나름의 이름과 효능과 용도가 있던 것이다. 원체 식물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할머니는 푸근한 산이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나무 박사, 꽃 박사, 버섯 박사 등등의 각종 명예박사학위를 부여했고, 길 가다 이름 모를 꽃과 열매는 사진을 찍어 할머니에게 묻곤 했다. 덕분에 아들은 길가의 발에 채이는 자그마한 꽃들도 눈여겨볼 줄 아는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



산책길



  강둑 위로 봄이 제대로 내려앉았다. 조금 늦은 감 있는 개나리와 벌써 초록 잎을 내밀기 시작한 벚꽃도 안녕했고, 볕 좋은 곳에 슬슬 고개를 드는 여름 꽃과 꽃 잎을 날리며 머리칼을 흔드는 봄바람, 강 위에 뜬 오리배들까지. 완연한 봄은 어른, 아이도 할 것 없이 모두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이들은 팔랑팔랑 날리는 벚꽃 잎 마냥 할머니 곁에 붙었다 떨어졌다는 반복 했다. 바람결에 휘 날리면 꽃 사진을 찍거나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는 옆구리에 찰싹 붙어 질문을 쏟아냈다.            


  “할머니,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

  “이 가시 많은 나무는 무섭게 생겼어요. 뭐예요?”

  “할머니 덩굴이에요!! 포도덩굴도 이렇게 생겼어요!”

  “할머니 이 꽃 예뻐요.”     


  3D 서라운드 돌비 사운드 못지않은 두 아이의 질문 폭격에도 엄마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정성껏 설명을 해줬다. 나라면 벌써 ‘그만~!’ 내지는 ‘그냥 눈으로 봐~!’라고 몇 번을 말했을 터였다. 봄볕 못지않은 엄마의 손주사랑에 프로반성러는 오늘도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크게 멀지 않은 거리를 산책한 것 치고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 시선에 일일이 응하다 보니 걸음이 나아가질 않은 것이다. 산책을 마치니 내내 마음에 걸렸던 말이 기어코 나왔다.       


  “저녁 먹고 가~”     


  내일 강의 준비와 학과 과제물에 오늘 밤도 잘 못 주무실게 분명한데도 엄마는 잊지 않고 우리의 저녁을 챙겼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오늘도 엄마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엄마에게 내일 일정에 지장이 없는지 여쭈어도 돌아오는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애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세상에 사랑이란 주제만큼 놀랍고 경이로우며 다채롭고 풍성한 게 또 있을까 싶다만, 사랑의 형태만 두고 말하자면 조부모의 사랑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랑의 방식이야 때론 뒤틀리고 비뚤어지거나 격렬하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는 것이지만, 애정이라는 본질만 두고 보자면 할머니의 사랑만큼 크고 절대적인 내리사랑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할 일이 얼마나 남아있든, 혹은 얼마나 피곤하거나 하는 것과는 무관한, 설령 나의 좋음과 너의 좋음이 다를지라도 단지 사랑하기에 기꺼이 너의 좋음에 함께하고 눈 맞추고 대화하는 것. 애정의 크기란, 사랑의 크기란 그렇게 가꿔지고 키워지는 것이다.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남편에게도 오랜만에 정성을 들여봐야겠다. 어느 날 문득 가꾸지 않아 잔뜩 쪼그라든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이들 재우고 맥주에 야구경기나 같이 볼까.   



                                                                                               - 가슴 몽글해진 봄의 산책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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