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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y 04. 2022

나와 닮은 너를 사랑하는 일

둘째 편

아이의 이야기


  친구들이 말하길, 내가 둘째를 낳고 키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가 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진 않으나 일면 그렇게 보일 수 있어 딱히 부정은 하지 않는다. 둘째를 가졌을 때 둘 이상의 자녀를 키우는 선배 맘들은 하나 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아들을 키워봤으니 딸은 거저 클 거라고. 하지만 출산 후,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첫째가 보통의 아들들에 비해 조심스럽고 젊잖은 데 반해, 둘째는 보통의 딸과는 다른(적어도 내가 들어온 딸들의 특성) 무언가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는 여느 여자아이들에 비해 굉장히 터프하고 거침이 없는 성격을 지녔고, 비슷한 유형의 사례들은 주로 아들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들 맘의 고충을 겪어보지 못한 내게, 이 섬세한 감수성의 와일드한 딸의 탄생은 또 다른 신세계로 다가왔다.  


  아이는 오빠와는 모든 점에서 달랐다. 일찍이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도 할 말을 다했고, 요구사항은 분명하게 피력했으며,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오빠를 때리고 모른 척할 줄을 알았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는 힘자랑하기를 즐겼는데, 덩치에 비해 무거운 물건을 보란 듯 번쩍 들어 올리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어른들의 반응을 유도하기도 하고, 아장아장 걸으며 복도에 놓인 간이의자를 끝에서 끝까지 밀고 다니기도 했다. 20개월 무렵에는 원피스를 입고 오빠가 한창 가지고 놀던 축구공을 인터셉트해서 드리블로 질주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오빠가 타는 킥보드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스스로 타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원피스를 자주 입던 이 작은 소녀장사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여느 집 막내들처럼 본능적으로 예쁨 받는 법을 터득한 아이는 '스치면 인연' 수준의 남다른 사교력을 뽐내기도 했는데, 놀이터나 공원에서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친구 부모님 곁에 앉아 그 집 아이인양 편안하게 간식을 즐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귀엽다며 막대사탕을 건네는 어른에게는 망설임 없이 오빠 몫을 함께 요구하는 능청스러움을 선뵈어 엄마를 놀라게 했다. 아이는 단호한 태도로  "저희 오빠도 있는데요. 두 개 주셔야 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반전 넘치는 매력쟁이의 장난기와 능청스러움은 내게서 온 것이다. 유년시절 한 가닥 했던 말괄량이의 유전자는 어디 가지 않고 딸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는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기가 죽는 법이 없었다. 아주 호되게 혼이 나도 눈물을 쏟을지언정 뒤끝이 없다는 건 엄마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를 혼내고 나면 어김없이 후회가 밀려오는데, 상황이 종료되고 속상했을 아이를 보듬어 주려 이름을 부르면 '응? 무슨 일 있었어?' 하는 표정으로 밝게 대답을 해 준다. 축 쳐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 일이 있던 없던  "엄마 좋아~~"하며 안기는 사랑스러운 딸에게 위로를 받는 건 언제나 내 쪽이다.


  물론, 매사에 심각한 게 없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하다.



질주본능





나의 이야기



  일전에 첫째를 보며 남편이 했던 말이 이해가 된다. 남편은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나는 딸의 사사로운 행동거지 하나하나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호기심을 빙자한 충동성과 무모함, 넘어지고 깨지고 울어보기 전엔 배우지 못하는 점이나 무엇이든 쉽게 접하고 쉽게 싫증 내는 진득하지 못한 성격까지. 얼굴은 아빠 도플갱어 수준이지만 영혼은 오롯이 엄마에게 받은 것만 같은 아이를 보며 '하드웨어는 아빠, 소프트웨어는 엄마'라는 우스갯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래서 어른들이 '씨 도둑질은 못한다' 고 그랬나 보다.

 

   나와 다른 아이를 키우는 건 스스로를 내려놓는 과정이다. 나와 다른 시선, 생각들로 가득 찬 아이의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려면 엄마의 주관을 잠시 물려놓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나와 닮은 아이를 키우는 일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이다. 내 과거의 좌충우돌과 무수한 시행착오들, 관계에서의 문제들과 거기에 파생된 부차적 감정들의 연장선에서 아이를 바라보게 된다.  '저기서 저렇게 행동하면 친구들이 싫어할 텐데', '어~ 저러면 안 되는데', '저건 버릇없는 행동인데. 잡아줘야 하나?' 등등의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올라 아이에 대한 믿음보다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아이의 시선과 생각, 감정들을 바라보기보단 나의 생각과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걱정은 나의 것일 뿐, 아이의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나와 닮은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세계를 반추하는 과정이다. 때때로 그 속에서 반갑지 않은 기억들과 직면하기도 하고,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감정의 잔해를 좋든 싫은 재 경험하기도 한다. 동시에 나의 것이었던 것들을 아이의 세계에 함부로 투사하지 않으려 내 안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관찰하느라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도 한다. 나를 닮았지만 내가 아닌 너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 위한 엄마의 노력인 것이다.



  와장창창!!

  "....."(눈치)

  "......(후...) 괜찮아. 안 다쳤어?"

  "응, 괜찮아. 미안해 엄마" (꼬옥 안기며)


   미운 모습도 적당히 눈감고 보듬어주는 것.

   어쩌면 내 속에 남아있을 지 모를 미운 나를 이해하고 안아주 듯, 그렇게 너를 한 번 더 안고 보듬는다.  


   이것이 나와 닮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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