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중독되다
자동차 보험 갱신기간이 도래해 이곳저곳에 비교 견적을 받다 한 보험사에서 진행 중인 할인 이벤트가 눈에 들어왔다. 일정기간 하루 5 천보 이상 걸어서 미션을 성공하면 전체 보험료를 할인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거 한번 해볼까? 나 못 걸어도 5 천보는 걷는 것 같은데."
"아니, 하지 마. 당신 5 천보 안 걸어."
... 발끈!
나는 그 길로 핸드폰에 만보계 어플을 깔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원체 기록에 집착하기도 하고 때론 정도가 심해 강박증으로 발전하기도 하는지라, 나는 일찍이 SNS도 끊고, 어렵게 습관들인 가계부 쓰기(지난달 지출금액 비교에 압박을 받아)도 중단을 했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발행했던 날도 뒤늦게 브런치에 라이킷 알람 기능이 있다는 걸 알고는 혼자서 "헉!!!" 소리를 내며 당황했다.
... 글을 공유하는 플랫폼이니 이런 기능은 당연하겠네... 하하하...
나는 지금도 글을 발행하고 통계치만은 보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있다. 보고 나면 보나 마나 집착할 게 뻔하니까. 혼자 흥분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미친년 널뛰듯 난리법석을 떨게 뻔했다. 하지만 차마 새 글 알람 기능은 끄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죽 그대로 둘 것이다.
아무튼, 남편이 쏘아 올린 작은 공에 잔뜩 오기가 생겨버린 나는 보란 듯 하루 도보량을 측정하기로 했다. 아침에 아이들 등원으로 시작해 되도록이면 차를 타지 않고 걷다 보니 별다른 이벤트 없이도 가볍게 7~8 천보가 찍혔다. 이런... 누가 5 천보 안된다고 했어... 우 씨... 이럴 줄 알았으면 할인 이벤트 신청하는 건데...
어딜 가나 핸드폰을 갖고 다니니 자연스레 하루의 기록이 남았다. 어플에 매일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어플 자체에서 배지와 메달 수여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었으며, 거기다 엄마의 만보계 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한 아들의 검열이 추가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동네를 도는 것으로 모자라 기어이 아침 등산 코스를 추가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결과는 뻔하다. 나지막한 산을 오르내리는 걸 우습게 알기도 했고, 거기다 원래 하고 있는 요가도 쉬는 날 없이 계속하고 있었으며, 주중에 아이들 병원 진료 일정 소화에, 밤늦게 글을 쓰고 잠이 부족한 날이 있으니 버틸 재간이 있나. 하루 18,440보(12.17km)를 기록한 날, 나는 그 길로 이틀을 앓아눕고야 말았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 이거늘. 고삐 풀린 욕심에 보기 좋게 당했다.
별수 없이 나름의 룰을 정하기로 했다. 하산 후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하고 최소 30분은 바른 자세로 누워 휴식을 취할 것. 힘들 때는 무시 말고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 쓸데없이 오기 부리지 말 것. 매주 수요일은 산을 쉴 것. 특히, 기록에 목 매지 말 것!
건강하게 안 아프려고 하는 운동임을 잊지 말자.
느긋하고 꾸준하게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것만큼 현명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