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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ATEVER Feb 08. 2017

선택받지 못함에 관하여

사람이 물건은 아니지만, 부득이하게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성 간의 만남이 그렇고, 회사에 들어가는 일이 그렇다. 누군가는 선택을 받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선택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선택받지 못하는 일은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사람에 따라 쿨하게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선택받지 못하는 일이 반가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면접에서 떨어지는 일부터 소개팅에서 다음 만남을 거절당하는 일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처의 내면에는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 당했다는 일시적인 열등감이 스며들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그냥 '선택'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의 자존감까지 지켜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상처에 시간보다 좋은 약은 없다지만, 때로는 생각의 전환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선택의 주체를 '나'로 바꾸고 선택의 대상을 '물건'으로 치완해 보는 것이다. 결정의 순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상품의 절대적인 질일 때도 있지만 의외로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분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마음을 가라 앉히고 싶을 땐 콜라보다 커피를 선택하고, 답답함을 풀어내고 싶을 땐 커피보다 콜라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피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도 당시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또 소품 가게에서 예쁜 그릇을 보고 '참 예쁘다'라고 느끼기는 하지만, 당장 집에서 그릇 쓸 일이 많지 않다면 선택을 보류하기도 한다.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선택자의 가변적 취향과 상황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선택의 기준은 늘 가변적이다. 대상의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진열대에 놓이고 가격이 매겨졌다는 것은 최소한의 기준은 이미 통과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소개가 되었고, 누군가에게 면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비슷하게, 이미 최소한의 기준은 넘어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의 기준은 말했듯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된다.


그래서 크게 실망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선택받지 못한 것은, 잠시 집어 들었던 예쁜 그릇처럼, 가치를 확인했지만 지금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아서 내려놓은 것과 같다. 그릇을 내려놓았다고 그릇의 가치가 결코 변하지는 않는다. 그릇의 가치를 '지금' 소유하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면 될 뿐이다. 


나는 나다우면 될 뿐이다. 선택받지 못했다 하여, 끊임없이 나를 바꾸려 하고, 있지도 않은 절대적인 기준점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사람의 매력은 언제나 '나다움'에서 나온다. 처음부터 선택자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기보다는, 그래서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어색하게 서는 것보다는, 나만이 지닌 것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선택받지 못했다 하여 실망할 필요도 나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도 없다. 나라는 사람의 숭고한 가치를 결코 남이 흐트러뜨릴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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