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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May 26. 2019

5월의 느린 산책

나를 감싸고 있는 굴레를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은 꽤 큰 해방감이다. 그것이 단 하루뿐인 토요일 늦은 저녁이라도. 책장 넘기듯 쉽게 갈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지만 말이다. 

여유롭게 경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창 밖으론 담장에 걸린 빨간 장미가 피어나는 풍경이 보이고, 눈 같은 꽃을 떨구고 신록을 피워내는 이팝나무 아래로 이름 모를 흰 꽃들이 강강술래 하듯 그를 감싸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여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이다. 


되돌아보면 지난 한 주도 타임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보면 평범한 일상들로 꾸며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모님 전화에 화들짝 놀랐었다. 오랜 시간 당뇨를 앓고 있는 엄마가 이번에 는 장염으로 며칠을 견디다 병원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아프면 바로 전화를 하면 걱정이 덜 되는데 참다가 참다가 견디지 못할 즘에야 연락을 하니 걱정은 배가 된다. 다행히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어서 약을 먹고 가라앉았다. 오전에 시간이 있는 아내가 병시중을 할 수 있어 새삼 다행스러웠다. 내가 고맙다고 하면 '뭘, 당연한걸'하고 짧게 답을 한다. 아내의 짧은 답에 깊고 긴 고마움을 느낀다. 

5월의 사무실엔 외부행사가 많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온다. 그래도 실타래처럼 엉키지 않고 풀려가는 것을 보면서 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 평온한 일상을 위해 아침엔 일머리를 꿰어 보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을 그려보곤 한다. 사실은 제일 중요하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상은 매일 이렇게 작은 수고들이 뭉쳐서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퇴근 무렵엔 공부방을 하는 아내의 저녁을 챙기는 것도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샐러드를 사가기도 하고, 전화나 SNS로 주문을 받아 사가기도 한다. 대여섯 시간을 아이들과 씨름하는 일이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닐 터, 헛헛한 배를 채우는 것이 간과할 일이 아닌 것을 나이 먹어 가면서 알았다. 젊었을 땐 빈손이었다가 요즘엔 집에 들어갈 때 뭔가 들고 가지 않으면 허전하다. 점심을 잘 먹어서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는 당부를 미리 받아도 괜히 그러는가 싶기도 하고, 그랬다가 진짜로 배가 고프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더해져 헷갈린다. 

"언제쯤 평일 저녁을 함께 먹게 될까?"

"이제 일 그만하자"라고 하면

"당신이 애들하고 나 먹여 살릴 만큼 벌어오면"한다. 

크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살만하지만 욕심을 내 좀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둘이 합의를 했다. 아이들이 제 힘으로 세상 살 수 있게 되고, 우리 힘 있어 여행 다닐 여유가 있을 때까지만. 그래서 조금만 아주 조금의 시간만 더 견뎌 보기로. 


근사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의림지로 산책을 갔다. 5월 중순의 날씨가 한 여름보다 더웠으므로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왔다. 연인들과 부부들,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걷고 뛰는 모습들로 다양하다. 소나무 숲과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물 바람이 시원지만 가득해야 할 저수지는 가뭄으로 갈증을 느끼는 듯 말라가고 있는 듯했다.   

걷다가 문득 아내 손을 잡으려고 하니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연인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냥 가까이서 걷고 있는데 우리가 팔짱을 끼고 걷자니 왠지 쑥스러웠다. 

"사람들이 우리를 불륜으로 보지 않을까? 친구들이 농담 삼아 부부가 이러는 거 아니라고 하던데"

시답잖은 말에 함께 웃으며 우리는 계속 팔짱을 끼고 걸었고, 길 중간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 연인을 위해 오던 길을 다시 뒤돌아 가는 척도 했고, 길 중간에서 펄쩍펄쩍 뛰며 인생 샷을 찍는 여학생들의 사진 배경이 되지 않기 위해 잠시 기다려 주기도 했다. 

박물관 뜰에는 자전거와 보드를 타는 아이들의 웃음이 꽃처럼 피어났고, 지붕 너머로 태양이 남긴 멋진 여운의 노을이 어둠에 지워지고 있었다. 


지난 한 주간의 시간을 위해 베푼 산책은 느리고 짧았지만 다시 시작될 미래의 시간들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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