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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Apr 03. 2020

앞에 두고 멀리 돌아가는 어리석음

나이먹어가면 사고의 유연성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몸살 기운이 좀 돌아. 춥기도 하고. 감기 인가 봐."

  아내의 목소리가 기운 없이 들렸다. 뜨끔했다.    

  "열은?" 하고 제일 먼저 물었다. 

  세월이 하도 수상하니 열과 기침이 있는지부터 물어보게 된다. 혹시라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머릿속으로 절차를 생각했다. 1339에 전화를 걸고 보건소에 들러 검사를 해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판정이 나올 때까지 나는 사무실 출근을 하지 못하고, 집에 공부하러 오는 애들은 또 어쪈단 말인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곶감이고, 전쟁이나 핵의 공포 보다도 더 무서운 게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 참 뒤숭숭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퇴근길에 감기 몸살약을 사러 갔다. 조금 전에 아내에게 들은 증세를 금방 잊었다. 으슬으슬 춥고, 뭐라고 했는데....... 

  하는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두통이 좀 심하다는 걸 까먹었다. 다시 물었다. 열은 없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열은 없다고 했다. 약사에게 열이 없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약국의 위치는 이렇다. 사무실에서 아파트 사이 2차선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우체국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길 건너 의원 옆에 약국이 있고, 약 200m 아래쪽에 작은 사거리 모퉁이에도 약국이 있다. 

  차를 중간쯤에 세우고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니 아래쪽 사거리 약국은 컴컴했다. 천상 길 건너 의원 옆에 있는 약국으로 가려고 맘을 먹었다. 빵집과 아이스크림 가게, 피자집도 환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서서 약국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8시가 가까워 문을 닫지는 않을까 괜히 불안해졌다. 어떤 남자가 문밖으로 나와 뭘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불이 꺼질 것만 같았다. 

  무사히 길을 건너고 약사에게 아까 생각한 대로 열이 없다는 말을 제일 먼저 했고, 몸살과 두통이 약간 있다는 증세에 합당한 약을 받아 들고 나오며 '휴'하고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느긋하게 다시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 빵집과 아이스크림 가게 사이에 약국이 보였다. 그것도 위에 걸린 간판도 모자라 길가에 네모로 세워진 간판까지 너무도 환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아까 그 옆을 지나온 것이었다. 

  모든 것들은 생각하고 맘먹은 것만 보이는구나. 나는 여태껏 작은 사거리와 길 건너편 약국만 생각했기 때문에 중간에 새로 생긴 약국은 보지 못한 것이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볼 생각도 안 한 것이다. 환하게 밝힌 네온간판의 "약"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운전하면서 사거리에 진입할 때 세 방향의 길이 다 보였는데 지금은 시야각이 좁아져서 정면의 신호등도 잘 안 보고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어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신체뿐만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도 떨어지는 때가 되었나 보다. 나이먹어감은 신체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경험에서 오는 지혜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아닌가 하는 절망감도 생겼다. 사고가 경직되면 고집으로 비칠 수 있는데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이 이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겨우 약국 하나 못 보고 지난 것으로 지나친 비약을 한 게 아니가 싶기도 하지만 비단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가 내 삶을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 

  약국을 옆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멀리 돌아가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사고가 경직되지 않도록 유연성을 더 기르는 훈련을 해야겠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횡단보도 앞에 김밥천국이 보였다. 비닐봉지에 천오백 원짜리 김밥 두 줄을 다랑거리며 들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약국을 돌아 간 일이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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