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견뎌야 한다.
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니 좀 심심하긴 했다. 어제 면접으로 안 좋았던 기분은 약간 괜찮아졌다. 아내에게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갔다.
잠을 청하려 해도 오지 않는 불쾌감은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핸드폰을 꺼내 한참을 보고 나서 다시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거기다 방이 환해진다. 허접한 암막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더 잠들기가 힘들다.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 10시쯤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후 1시에 일어났다. 3시간 자고 깬 것이다. 잠을 더 자려했지만 그러다가 아내가 집에 들이닥치는 시간에 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건 정말 최악이라 생각되어 다시 잠을 청하지 않고, 그 시간을 기상시간으로 정했다.
집에 있으면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려 물을 올려놓고 집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놀고먹지만 이 정도는 마땅한 내 일임을 안다. 건조대에 빼곡히 널려있는 마른빨래를 걷어 예쁘게 개고, 옷걸이에 걸거나 서랍장에 넣었다. 이쯤 되니 라면 물을 끓었고, 안성탕면 한 봉지를 열어 반으로 갈라 끓는 물속에 담갔다. 스프를 먼저 넣을까 면을 먼저 넣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스프를 먼저 넣었다. 누군가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 중 스프를 먼저 넣으라는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신은 아직 비몽사몽이다. 면이 적당하게 익으려면 좀 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고 침대 위에 헝클어진 이불을 예쁘게 정돈했다. 밀려나간 깔개부터 정 사각 틀에 맞추고, 인당 두개의 베개 중, 쿠션 역할을 하는 베개를 머리 위에 놓고, 진짜 베개를 머리맡에 놓았다. 다음으로 감촉이 좋은 두툼한 면이불 오른쪽 귀퉁이를 두 손 넓게 잡고, 크게 하늘로 던져 올렸다가 내렸다. 침대 위로 주름 없이 펼쳐진 덮개를 보면 기분이 좋다. 아내가 정돈하는 방식대로 이불 위쪽 끝을 한 뼘 정도 밖으로 접어 호텔 침대 느낌이 나게 한다. 이전엔 잘 몰랐지만 그렇게 하니 분명 고급스럽다. 아내에게 배운 대로 항상 그렇게 세팅을 한다.
이쯤 되니 라면 물이 생각난다. 라면은 이미 익고도 남는 시간이 됐다. 스프를 먼저 넣건 안 넣건 맛은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늦었지만 계란을 풀어 넣었다. 이미 면발은 불어 넉넉해 보였던 국물을 모두 머금었다. TV에서 어떤 연예인이 이렇게 불린 라면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난 실수로 불렸지만 맛은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을 열어보니 처가에서 가져온 반찬들과 아내가 만든 반찬이 수두룩 했다. 하지만 라면에 어울리는 반찬은 역시 김치와 깻잎 고추 장아찌라는 생각이 들어 두 가지 반찬을 통째 꺼내 뚜껑을 열어 먹을 준비를 마쳤다.
안경에 김이 서려 면발을 한번 끌어당기고 나서는 안경을 벗었다. 하지만 벗고 나니 감촉이 이상해 다시 안경을 썼다. 지금도 착용하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맘에 안들지만 어쩔 수 없이 쓰는 안경이다. 결혼식 때 신랑 예복과 어울리게 코디하느라 금태 동글이 안경을 사서 썼지만, 그때가 아닌 지금 안경을 쓰고 거울을 보노라면 눈썹이 옅어서 그런지 모나리자의 얼굴 같아 보인다. 결혼식 당시 머리를 진한 갈색으로 염색하는 바람에 눈썹도 같은 색으로 염색을 했었다. 당시는 분명 안경이 어울렸었는데 지금은 화장을 안 해서인지 흐릿한 눈썹 때문인지 여전히 모나리자로 보인다. 옅은 눈썹에 금테 안경을 쓰니 안경테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그럼 예전에 쓰던 안경을 쓰면 될 것 아닌가? 예전의 안경은 아내가 침대 위에서 깔아뭉개 부러뜨렸다.
아내가 부러뜨린 안경을 좋아했던 이유는 유행을 타지도 않으며, 무난한 검은색에다 알의 크기도 적당했다. 한때 자주 갔던 인터넷 쇼핑몰에서 안경테를 8~90%를 세일한다고 하여 7년 전에 구입한 안경테가 지금의 부러진 안경이다. 그 안경이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소재'다. 당시 처음 들었던 '울템'이란 소재에 대한 사이트 설명을 기억한다. 힘을 주어 구부려도 금방 펴지는 복원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이름도 그냥 '울템'이 아니었다. '울트라 울템'이었다. 죽을 때까지 착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껏 수십, 수백 번 떨어뜨려도 태가 휘거나 알이 깨지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남들한테 자랑하느라 스스로 바닥에다 힘껏 던져 보이기도 했다. 여전한 강성이었지만 나만 좋아했다.
이런 안경이 한순간에 부러졌다. 그의 임종을 보지도 못했다. 한쪽 귀테와 나머지 부분을 양손으로 나누어 쥐고 나온 아내의 손을 보고 알았다. 순간 '어떻게 부러졌지?'생각했다. 절대 부러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울트라 울템'이 부러졌다. 경위는 이렇다. 내가 침대 위로 던져놓은 모양은 두 알은 바닥으로 향했고, 한쪽 귀테는 위쪽으로 접히고, 다른 한쪽 귀테는 위로 열려있었다. 아내는 하늘 향해 펼쳐있는 오른쪽 귀테를 무의식적으로 공략했다. 침대의 안락함을 만끽하고자 몸을 침대로 날리는 순간, 하늘 위로 서있던 오른쪽 귀테를 중력의 방향으로 눌렀다. 테의 재질은 분명 견딜 수 있었지만 눈과 귀를 잇는 이음새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눌려 터지게 된 것이다. 님은 그렇게 가셨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은 안경을 써야 한다. 맘에 들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스페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또다시 이전 구입했던 사이트에 들어가 같은 종류의 '울트라 울템'을 찾는다. 하지만 이제는 '울트라'가 붙은 울템은 없다. 과장광고로 신고당한 것인가? 아님 내가 못 찾는 것인가? 내가 대변해 줄 수 있는데. '울트라'를 붙일만하다고.
라면을 다 먹고, 남은 집 청소를 마쳤다. 노트북을 펼쳐 '네이버 포털'에 들어가 몇 개의 기사를 검색했다. 대충 내용을 읽은 후 다시 노트북을 덮었다. 소파로 이동하여 편한 자세를 잡고 '돈키호테' 1권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역시 책을 읽을 때가 마음이 가장 편하다.
오늘은 아내가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온다고 한다.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지금 먹을 것도 아닌데' 하고,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전화 한 통이 오긴 했다. 현금으로 처리하겠다던 상대 차량이 견적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며 다시 '보험처리'하겠다고 했다. '얼씨구나' 하며 '랜트'를 하려 했지만 그쪽 보험회사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내린 결론은 자신들이 100%로 과실이 아닌 것 같다며 당신 보험도 알아보고 거기서 100% 우리쪽 과실로 나오면 다시 얘기해보자고 한다. 랜트를 안 하면 수리비 전액은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게 뭔소린가 싶었지만 긁어 부스럼 내고 싶지 않아, 랜트는 됐고, 차만 잘 고쳐달라고 했다.
오늘 하루 중 특별한 이벤트라면 밤 시간에 이뤄진 아시안컵 '한중전'이다. 시진핑이 축구로 세계 강국을 이루자고 한마당에 중국 선수들이 어떤 경기를 펼칠지 너무 궁금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도된 중국의 대기오염 물질이 바람을 타고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흩뿌리며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다.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고통받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세먼지'에 대해서 모르쇠와 적반하장 격인 '중국'에게 정말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미세먼지 몰아주기로, 축구 한판 해볼껴?" 이미 우리의 승리임을 알고 해 본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