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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Sep 27. 2023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것


 여름의 정열이 아스라해져서 가을이 온 것일까, 아니면 가을이 와서 여름의 정열이 희미해진 것일까. 불꽃은 완전히 사그라드는 그 순간까지도 따뜻하다. 초라한 식음이 아니다. 아직 꺼지지는 않은 불꽃, 여름의 잔해. 내 가슴속에서 속삭이듯이 타닥거리는 작은 불꽃은 여름이 남긴 흔적이다. 재앙에 가까운 것일수록 흔적을 남기기를 원한다. 사랑도 일종의 재앙이기 때문에, 그것이 떠난 자리엔 그을음이 남는다.


 아직 꺼지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희미하게 타오를지도 모르는 불꽃은 단순히 말하면 글에 대한 열정이었고, 은밀하게 말하면 이해에 대한 욕망이었다. 내가 접촉할 수 없는 타인의 내밀한 속을 들여다보고 교감하고 싶은 욕망. 타인이 남긴 흔적—정직하고 퇴폐적인 활자들—에서 타인의 존재를 빚어내고 그의 감정을 흡수하는 일은, 웬만큼 미치지 않고서는 못한다. 그의 작품에, 그의 눈빛과 그의 간절함에.


 세상 어딘가에 새겨진 그의 흔적을 눈을 감고 더듬으면서 나는 나의 밤에 휘발유를 부었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방화를 부추겼다.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만이, 내가 가고 싶은 감성의(활자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정열적인 내가 되는 밤에는 항상 파편들이 굴러다녔고, 생각은 두통을 만날 때까지 질주했다. 나의 아침은 자주 삭제되었다.


 여름의 정열이 아스라해져서 가을이 온 것일까, 아니면 가을이 와서 여름의 정열이 잔잔해진 것일까. 정말 만약에, 타닥거리는 작은 불꽃이 내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조용히 사그라든다면 그 사그라든 곳에는 물론 재도 날릴 테지만, 표식과 같은 그을음이 남을 것이다. 그을음이란 바로 존재의 흔적, 내가 타인으로 인해 뜨겁고도 슬펐다는 증거이다. 그런 표식을 남기는 사람은 연인일 수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름다운 문장가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문장가에 대한 애정은 고요히 타오르지만 아름다운, 감각적인 문장에 대한 열망은 늘 간절하다. 나의 문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나는 없다. 담담하고 깊게 쓰고 싶다. 뜨거운 설움을 업고 울던 나의 가슴을 선선한 바람이 식혀주는 계절, 바로 가을이 와서 나는 일상과의 타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없는 바쁜 일상에 치여서 하루에 읽고 쓸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 요즘 나의 고통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 같다.


 여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다. 밤에 귀가하면 시간은 나의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두통과 피로를 안고 침대에 누워버린다.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수도 있다. 피로가 극에 달한 날은 그렇다. 어제 선선한 가을밤에 나는 피로한 몸을 가누지 못하며 침대에서 한참 게으름을 피우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껴 몸을 일으켜보았다. 좋아하는 최 작가의 그윽한 산문 서너 편을 읽고나니 나도 쓰고 싶어져서 아니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펜을 잡았다.


 다음날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밤을 새울 수 있는 자제력을 익히려면 아직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그러나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듯이, 나에게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음을 느낀다. 쓸 시간이 없다고 일상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가을바람이 가르쳐준 것이다. 가슴을 식혀주는 고마운 가을바람이. 여기서 더 추워지면, 지금 세상을 향해서 살짝 열린 나의 가슴이 다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추우니까. 추운 바람이 마음에 새어들어오면 나와 낯을 익히고 싶은 공허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올 테니까.


 쓸쓸해지기 전에 세상을 많이 눈에 담아두어야겠다. 나의 내부를 오래 들여다보았으니 이제는 외부에 무엇이 있나 무슨 존재가 걸어다니나 관찰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한 시간 두 시간이라도 나의 방에서 조용히 쓰자고 생각한다. 한 시간 두 시간뿐이어도 괜찮다. 그 시간에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해도 좌절은 과하다. 늘 나에게 좌절이란 것은 과한 것이다. 흘러가는 마음을 잡을 수 없듯이,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흘러가는 나를 막지는 말라고 가을바람이 인자하게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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