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가 잦은 가뭄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 향기가 없는 계절. 가끔 행복한 비가 어깨를 적실 때 나는 웃음을 짓기도 한다. 비는 항상 체온처럼 따뜻하다.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온도이다. 하지만 비는, 갈구할 것이 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행복을 원하는 것이지 희망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은 그림 속의 탐스러운 떡이다. 희망은 실현되는 순간 희망이 아니게 되니까, 희망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향기 없는 계절. 무감과 무취에 지쳐 한 걸음 밖으로 나오자 콧구멍을 찌르는 가을의 구수한 체취는 세상에 대한 나의 실낱같은 기대를 무력화시키기 충분했고. 짓뭉개진 은행을 피해서 걸음을 옮기는 나. 낙엽이 바람에 죄다 지고 헐벗은 나무가 으스스하다.
내 지난 과거의 고독한 곳에 그것과 똑같은 모습의 나무가 심겨 있을 것 같다는 오묘한 직감. 애정이 벗겨진 서러운 사람처럼 선 나무의 잔가지가 하염없이 가늘다. 누군가의 운명적인 체취를 싣고 흐르는 바람은 내가 모르는 곳을 떠돌 뿐이고, 나는 관계없는 사람의 관계없는 냄새를 맡는다. 원하지 않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