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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Apr 18. 2024

재즈 피아노의 몽상


 아파트의 밤이 깊었다. 나는 어제와 같은 나의 안에서 숨을 쉬었다. 밤의 공기라고 해서 낮의 공기보다 더 청결한 건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가슴은 봄코트로 몸을 싸맨 애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문전박대까지는 아니었지만, 심기가 불편해진 봄코트 안의 애수는 나보다 더 마음이 보드라운 누군가를 찾아 담을 넘었다. 나는 어설픈 미소를 짓지 않았다.


 나는 나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을 왜곡하는 문체에 의해 내가 받은 장난스러운 피해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겠지,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그건 나도 가끔 헷갈리니까. 나는 생각했다. 느끼기에, 나는 지금처럼 나란 주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수필이란 장르에 기대어 글을 쓸 때는, 그 장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드러내는 데 어색함과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차라리 소설적 문체에서 나는 날개를 달 수 있었다. 나는 소설에서의 자유를 내심 엄청나게 사랑했다.


 가상에의 탐닉.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내가 직접 경험한 것보다 더 리얼하게 체험하는 게 가능하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경험으로만 살아가야 했다면 나는 진작에 아사의 두려움을 호소했을 것이다. 경험한 일의 다양성이 그리 빈곤한 것도 아니면서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나라도 얻고 싶어서 달콤한 안달을 냈을 것이고,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날에는 정체되어 있다는 슬픔이 안락한 우울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가상에의 몰입이 살아가는 데 있어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나는 소설을 쓰면서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에의 몰입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나는 나의 소설적 문체에서의 무아경의 춤과 흔치 않은 깊고도 진지한 애정의 순간을 정말이지 좋아하지만, 한순간도 현실을 잊은 적은 없다. 가상에서의 자아 탐구가 현실에서의 자아 탐구보다 행복할 순 있어도,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상에서는 쓴 맛도 달콤한 쓴 맛이지만, 현실에서는 때때로 단 맛도 쓸쓸한 단 맛이라 가상에서의 성장에만 몰입한다면 언젠가 현실의 무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의 자유로운 호흡을 붙잡고 있되, 현실에서의 단련을 소홀히 하지 말자고 성숙한 사람인 척 말해본다.


 나는 글쓰기라는 나의 일에 제법 진지해졌나보다—오늘 하루 고생한 나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의 문장은 남겨도 탈 없겠지. 나의 욕구는 때때로 노릿한 비린내를 풍기는데, 나와 비슷한 욕구를 지닌 사람의 비린내를 어느 날 청초하다고 느껴버린 뒤로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졌다. 관대함. 많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나의 정신적 욕구가 나의 육체적 욕구를 압도하는 자상한 밤에, 나는 어째서 구저분한 소설로의 도피를 택하지 않고 또 한 번 어정쩡한 자애(自愛)의 포즈를 취하고 만 것일까. 고작 나 자신을 조금 더 아껴주게 되었음을 고백하기 위해?


 그거야말로 글로 남길 만한 일이다. 우울, 고독, 권태, 검은 구름, 언제든 또 와도 된다. 우울, 고독, 권태, 검은 구름에 때때로 지배되는 마음이어야만 점차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해갈 수 있으니까. 야밤에 흐르는 재즈 피아노. 나는 피아노의 놀리고 달아나는 듯한 선율에 은근히 마음이 간질거린다. 피아노는 킥킥 웃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숙성된 눈물로 얼굴이 젖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이 싹튼 건 내가 재즈 피아노의 몽상 속에 갇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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