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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May 13. 2024

창가 자리에서


 파아랗다. 해가 저무니, 학교는 푸른 저녁 빛에 휩싸인다. 나는 학교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서 가벼운 쓸쓸함을 느끼며 어두워져 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스물셋, 스물넷의 색깔은 푸른색인데, 우울한 강물 같은 색깔이 아니라, 여름의 푸른색이다. 썩 유쾌한 색깔인 것이다. 벌써 오 월이 반이나 흘렀다. 나는 문득 학교를 떠나는 게 두려워졌다.


 현실의 나를 온전히 등진 새벽에 가슴에 흘러들곤 했던 완벽한 붉은색은 어디론가 새어나갔다. 여기 있는 건 현실의 나이다. 공상 속의 내가 아니다. 나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선선한 공기가 팔을 부드럽게 휘감는 것을 느끼며 어둠에 잠겨 가는 학교를 바라본다. 외롭고 의젓한 가로등 불빛이 하얗게 길을 비추고 있다. 길을 걷는 사람이나 학교를 빠져나가는 운전자들은 도움을 받겠지만, 나에게 저 빛은 너무 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요즘 하루하루가 도전인 것 같다. 쓸쓸하더라도 혼자라서 편한 길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가끔 진하게 스며오지만, 반대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나의 진로에 대해서 조언도 구하고 싶고, 안 가본 곳을 여행하고 싶다. 세상을 좀 더 알고 싶다. 여태껏 해보지 않은, 인생의 설계라는 것을 충분히 진지하게 해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내가 행복해지는 과정을 글로 써도 될까? 퇴폐도 불행도 매력적인 붉은색도 없는, 흔한 청춘의 고뇌와 시시한 일상을.


 나는 아름다운 고뇌의 언어를 추구하지만, 또 매력적인 붉은색의 모든 것에 심적인 끌림을 느끼지만 내 삶이 붉은색이어선 안 된다. 나는 반항을 싫어하고, 불화를 싫어하고, 피딱지 맺히는 싸움은 질색이다. 퇴폐적인 청춘물에 등장하는 갖가지 도전적인 행각들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 내가 못 하는 일들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잔뜩 긴장한 채로 교수님과의 아리송한 면담을 끝낸 후, 해가 저물 때까지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이 멍하니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다. 물론 책도 읽고, 맛있는 쿠키도 먹었다.


 이렇게 또 나의 하루가 지났다. 시간은 잔인하도록 평온하게 흐른다. 나는 졸업까지 일 년이 조금 더 남았고, 그 사이에 나의 20대가 걸어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솔직히 엄청나게 두렵거나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신경 쓰며 매달리고 있어서 나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학교를 떠나면 얼마나 낯선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유리창은 두꺼운 어둠에 덮여서 마치 거울처럼 내 얼굴이 또렷하게 비친다. 나는 유리창 안에서 나를 조용하고 건조하게 응시하는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 말을 걸지는 못한다.


 낯선 극장에 가서 처음 보는 연극을 보고 싶다. 얼마 전, 연극을 보러 갔는데 무대 위에서 배우가 담배를 피웠다. 배우의 입에서 흩어져 퍼지는 담배 연기가 나의 코를 휘감았고,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시시한 일상 속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길거리에서 불쾌하게 스치는 담배 냄새와는 달랐다. 우아하고 모호하고 유혹적인 향기였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나는 내심 담배 향기가 좋다고 생각하며 잠시나마 아득한 사랑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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