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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매 Sep 13. 2024

잠깐의 피폐

휘갈겨 쓴 소설


늦여름 빗소리에

주눅 들지 않는다

오연한 장미


제발 좀, 가라앉혀, 그래야 제대로 된 글을 쓰지, 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가슴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분노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궁색한 빗소리. 아까는 분명 창밖에서 희미하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흐르고 있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여자 작가의(그들의 이름은 중성적이었다) 작품을 읽다 말고 내면의 솟구침을 자제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여자 작가의 부드럽고도 간질거리는 문체와 마음을 압도하듯이 덮쳐오는 풍염한 묘사들을 의연히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막힌 듯이 답답했다. 나는 이런 걸 쓰지 못해, 그는 생각했다. 그만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글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의 헛헛함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핸드폰을 찾았다.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그는 오늘 저녁 독서모임에 사정이 생겨서 나갈 수 없다는 카톡을 보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읽자고 고른, 얼마 전 작지만 의미 있는 상을 거머쥔 비인기 여자 작가의 소설집은 털끝만큼도 그와 맞지 않았다. 그는 잠시 우중충한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우습게 들리겠지만, 살기가 싫었다. 이 여잔 왜 이런 글들을 써서, 왜 이런 애처롭고 드맑은 글들을 써서 내 마음을 진창에 처박는 거야,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짓씹었다. 아아. 나는 좋은 글쟁이가 되지 못할 거야. 이렇게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선.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자학은 언제나 그랬듯이 심각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희미하게 바이올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우중충한 날에 듣기 좋은, 부드럽고도 쓸쓸한 음색이었다. 그는 저 바이올린 음색과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를 알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일단은 여자였는데 성별이 무의미하게 사람 같은 느낌이 별로 없었으며, 물질로 치환하자면 고요한 밤바다에 서 있는 검푸른 돌바위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성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망할 것'을 사랑했다. 그는 그녀, 아니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으로 검은 타르향을 풍기는 바닷물이 진득하게 밀려오는 기분이었고, 가슴속이 온통 끈끈해져서는 괴롭게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를 응시하는 그 사람의 눈빛은 소름 끼치게 차분했다. 그리고 절절했다. 그는 그 사람의 눈빛 속에 깃든, 저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일렁임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걸 볼 때마다 내심 어깨가 펴졌다. 그는 사람 같지 않은 눈동자 속에서 익사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짙은 사람 내음 속에서 질식하는 것보다는. 그는, 얼마 전 평범한 사랑과 상실에 대한 섬세한 소설로 작은 상을 거머쥔 여자 작가의 소설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녁은 다가오고 있고 갈 곳은 사라졌다. 비가 계속 추적추적 온다.


그 사람과, 그 사람 같지 않은 여자와, 아니 그 여자 같지 않은 사람과 만남을 가지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만남의 횟수는 날짜처럼 착실하게 늘어갔다. 그 사람은 붉은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장미 같다고 중얼거렸는데, 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미 같은 건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이었기에.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의 불가사의한 말을 받아들이는 대신, 장미꽃과 그 사람을 연결 지어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닐 때도 있었지만, 그의 착상 속에서 떠오르는 검붉은 장미는 대부분 그녀의 얼굴을 틔워냈다. 그는 그녀가 장미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와 진한 애정 같은 걸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녀가 자신을 죽이든지, 아니면 그가 그녀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 목숨은 뭣 땜에 끊어지지 않고 있어.

-억울해서 못 죽겠어.

-뭐가 그렇게 억울해.

-그냥 억울해. 살아있는 건 좋아. 고독한 게 억울한 것 같아. 당신한테 빌어볼까? 나 좀 억울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는 장난으로 받아들였고 그녀도 흰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는, 그녀와 자신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느꼈지만, 어느 쪽도 결코 쓰러지진 않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장미의 의연한 오만이 각자의 가슴에 있었다. 그는 낡은 의자에 앉아 창 너머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 앞에 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거친 뺨을 감싸고 눈빛으로 말했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날 좀 사랑해줘. 그렇게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눈빛으로 애원하고 싶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일종의 거만이었다. 그녀는 그가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단 것을 느꼈고, 그러자 천천히 깊은 미소를 띠우면서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에게 말했다. 우린 너무 닮았다.


밤은 언제 올까.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그녀 앞에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건지, 자신이 그녀를 찾아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려운 것은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그의 집도, 그녀의 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께 잘 수 있는 침대와 함께 볼 수 있는 티브이와 불어오는 바람에 너울거리는 연먹빛 커튼이 있는 방이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 유연하고 꼿꼿한 그녀의 몸을 끌어안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고독은 곪아가는 동시에 치유되고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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