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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커피 Sep 09. 2024

오늘의 5분

출근하는 맛

인성이는 우리 반 쩝쩝박사다.


음식에 관련해서 아는 것이 정말 많다. 어떤 음식을 함께 먹으면 맛있는지, 우리 동네에 어떤 식당이 맛있는지 기가 막히게 알고 있다.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이 아이가 11살짜리가 맞나 싶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과 통통한 손으로 묘사하는 그 설명들이 어찌나 실감 나는지. 나도 모르게 추릅 침을 삼키게 만든다.


음식에 진심인 인성이는 소풍 때 싸 온 도시락도 남달랐다. 비닐장갑을 야무지게 끼고 김밥 위에 먹음직스러운 진미채볶음을 듬뿍 올려서 신나게 먹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인성이는 볼과 손만 통통한 게 아니라 마음도 꽤 통통하다.


그 먹음직스러운 김밥을 하나 완성해서 나에게 "아"해보라고 했다.


"선생님, 이게 보기에는 이래도 진짜 별미예요. 김밥 안에 진미채가 있는 거랑 이렇게 올려 먹는 거랑 천지차이라니까요. 한번 먹어보세요!"


인성이는 김밥한알도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쩝쩝박사다운 설명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나는 그 설명에 홀린 듯 아이 앞에 입을 쩍 벌렸고, 곧 물개박수를 치며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의 호들갑은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 맛있었다. 짭조름한 진미채가 김밥보다 먼저 입안에 닿아 감칠맛이 살아나고 이어 김밥 안의 밥과 안의 다양한 재료들이 뒤섞여 새로운 김밥 맛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인성이가 나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


2학기 개학은 했지만 찜통 같은 더위에 하루하루가 너무 지치는 한 주였다. 모든 교실이 냉방을 가동하는 바람에 낡은 학교 냉방 시스템은 냉방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도 교실의 온도는 27도를 웃돌았다.


2학기가 시작하는 주라 이것저것 제출할 것도 너무 많았고, 업무포털의 공문을 아무리 처리해도 새로고침을 누르기 무섭게 "1"이 생겼다.


아이들도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전의 리듬을 찾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고, 매 시간 놀자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을 간신히 이끌어가기가 버거웠다. (물론 놀아버릴 수도 있으나, 나의 오랜 경험상 학기 초에 너무 놀자는 대로 놀아버리면 이후에도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기 힘들다.)


그날은 아침부터 등원전쟁터와 주차전쟁터에 이끌려 갔다가 지친 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서야 했던, 유독 지친 그런 날이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를 느끼며 터덜터덜 교실을 들어서 간신히 출근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후덥지근한 교실의 공기를 느끼며 에어컨은 정말 켜져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느리게 부팅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잠시 한숨 돌리던 중, 쩝쩝박사 인성이가 등교했다.


"어서 와. 덥지?"


통통한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인성이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통통한 두 손으로 종이컵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선생님, 이거요~ 엄마가 챙겨주신 건 아니고 제가 챙겨 왔어요."


"뭐야?"


"이거 무지개떡인데요, 제가 오늘 아침으로 이 떡을 먹었거든요. 근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한번 드셔보라고 하나 챙겨 왔어요. 아직 따뜻하니까 식기 전에 드세요!"


인성이가 내민 종이컵 속에는 무지개떡이 빼꼼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인성아, 너무 고마워! 선생님 진짜 맛있게 먹을게!"



마침 1교시가 영어시간이라 아이들이 영어선생님과 영어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떡이 든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아침에 두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전리품을 얻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러려고 학교에 왔지.


맛있게 떡을 먹었다. 무지개떡이 뭐 별다른 맛이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아주 맛있게 떡을 다 먹었다. 그래, 이 맛이지. 이 맛에 학교 오지.


얼마 전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를 다시 재탕해서 보았다. (이 드라마는 아마도 매년 여름, 재탕을 넘어 삼탕 사탕까지 할 것 같다.)



삶이 무료해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구씨에게 염미정이 말한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그날 나의 5분을 인성이가 넘치게 채워주었다.


인성아, 고마워!



**인성이는 가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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