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이 식지 않을 거리. ‘딸아이가 바로 국이 식지 않을 거리에 이사 와 살거든요’. 박완서 작가의 90년대 인터뷰에 나오는 말이다.¹⁾ 나도 엄마에게 곧잘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엄마는 이 인터뷰를 읽은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아마도 그 시대 어른들이 생각하는 자식과의 가장 이상적인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 같다. 표현이 직관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다고 느꼈다.
엄마가 자리보전하고 누워 계시는 몇 개월 동안 아빠가 식사를 준비하셔야 했다. 아빠에겐 익숙지 않은 살림을 하려니 밥상은 부실해지고 엄마는 점점 더 식사를 못 하시는 상황이었다. 동생과 달리 나는 엄마의 음식 솜씨를 닮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 반찬가게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택배를 보내드렸다. 아픈 엄마 얘기를 할 때 같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셨던 사장님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서 많이 공감해 주시고 격려도 해주셨다. 내가 산 반찬 외에도 노인들이 좋아하실 만한 부드러운 반찬들을 몇 가지 더 얹어주시면서.
엄마가 5분 거리로 이사 오시니 내 일상도 돌봄으로 분주해졌다. 매일 들러서 집 정리는 물론 두 분을 모시고 여러 병원 방문하고 관공서 다녀오는 것이 생활이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삼시 세끼. 부모님이 원치 않아서 더 이상 반찬가게에 의지할 수도 없으니 내 손으로 두 분이 드실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다.
달걀찜은 내가 국민학생 시절 엄마가 집을 비웠을 때 처음으로 해본 반찬이었다. 큰 이모가 전화로 가르쳐 준 대로 해봤지만 평소 먹던 것과는 모양이 달랐다. 커서 생각해 보니 달걀의 양만큼 물을 추가로 넣어야 하는 걸 몰라서 부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당시엔 우리집 공장에서 일하던 오빠들도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먹기엔 간장 종지만 한 달걀찜 때문에 당황스럽고 볼품없던 아침 밥상이 생각난다. 이제 명란 달걀찜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살림 25년차. 입이 써서 도통 밥 넘기기를 힘들어하는 엄마의 아침 밥상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달걀 3개를 풀고, 동량의 물을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부드러운 달걀찜을 한 술 드시면서 지금의 아픈 시기도 부드럽게 잘 넘겨주시길 바라본다.
이사하는 도중에 고장 나버린 냉장고는 마치 현재의 엄마 같아 슬펐다. 새 냉장고가 오기 전에 빨리 내용물을 비워야 했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 갈무리해 둔 얼린 홍합 물이 보였다. 나를 낳고 내게 젖을 주기 위해 먹었을 젊은 시절 엄마의 미역국이 떠올랐다. 아이처럼 계속 잠만 자고 싶어 하는 엄마가 하루빨리 회복하기를 소망하며 오랜 시간 끓였다. 국이 식기 전에 엄마에게 가져다드릴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