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8경이 시작되는 한적한 동네 걷기
북촌에서 원서동이라 하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북촌이라 하면 보통 북촌한옥마을이 위치한 가회동이나 삼청동 혹은 계동을 주로 거닐기 때문인데 원서동이야말로 한적해서 걷기 좋고 북촌8경이 시작되는 동네이기도 하다. 창덕궁과 맞닿아 있어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북촌1경과 2경을 볼 수 있는 숨은 보물길이다.
삼청동 혹은 가회동에서 수 많은 사람들 발길에 지쳤다면 원서동의 한적한 골목을 걸어보자.
계동언덕 ----- 북촌1경 ----- 싸롱마고 ----- 북촌2경 ----- 춘곡의집 ----- 빨래터
원서동 골목으로 진입하는 방법은 창덕궁 돈화문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거나 중앙고등학교에서 내려가는 등 다양하지만 출발지를 계동 언덕으로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 지하철 안국역에서 내려 진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놓치지 말아야 할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언덕길에 맛집과 인기있는 커피점이 포진해 있다.
현대사거리에서 계동길로 들어서지 말고 창덕궁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면 마치 유럽의 상점을 지나는 듯한 붉은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흔한 조명 간판 하나 없이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옷가게와 편집숍으로 보인다. 언덕 끝으로 북촌1경의 풍경이 고개를 내민다.
언덕에서 내리막 길이 시작되면 창덕궁 돌담길이 보이고 그 위로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바로 북촌1경이다. 북촌1경을 감상할 수 있게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니 마음껏 카메라와 눈에 담아가도 좋다.
돌담길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규장각과 인정전 등의 전각들이 어깨를 겨루는 풍경이 한옥의 아름다움을 깨우쳐 준다. 눈이 좋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700년이 넘은 향나무 윗둥도 볼 수 있다. 아쉽다면 돌담길에는 늘 이질적으로 보이는 현대식 자동차가 늘어서 있다는 것. 워낙 북촌의 주차난이 심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돌담길 옆은 거주자우선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창덕궁 방향으로 바라보면 돌담길 반대편으로 도시의 빌딩과 빌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최근에 에피그램이라는 팝업스토어가 리모델링해 입주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공원슈퍼는 대기업 브랜드의 편의점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북촌2경은 반대방향이므로 뒤로 돌아 발걸음을 옮긴다.
돌담길을 좀 더 걷다보면 왼편으로 분위기 있는 한옥이 등장한다. 싸롱마고와 은덕문화원이다. 싸롱마고는 말그대로 카페인데 김지하 시인이 문예부흥을 목적으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 옆에 이웃하는 은덕문화원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도량으로 상시 개방하지는 않는다.
골목을 더 걷다보면 시골스러운 동네가 나온다. 부동산을 함께 하는 세탁소(실제 사장님은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쌀가게, 전파사, 미용실 등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 부근에 창덕궁 요금문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후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세탁소 왼쪽 골목으로 올라가면 빌라촌과 한옥이 어우러져 있다. 북촌에 유일하게 형성된 빌라촌이다. 그렇기에 북촌의 부동산 매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는데 이 곳에 빌라가 많은 이유는 창덕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때문이 아닐까 싶다.
브런치에 소개한바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커피점도 있다. 이름도 동네에 어울리는 동네커피이다.
돌담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계속해 걸으면 드디어 갈래길이 나온다. 북촌2경이 가까워진 것이다. 사실 갈래길이지만 걸어보면 서로 통하는 길인데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원서동 고희동 가옥을 둘러볼 수 있다.
원서동에는 고희동 가옥이나 백홍범 가옥이 있어 당시 북촌의 가옥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 고희동 가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이 직접 설계하여 40여 년 생활한 집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고희동 선생의 호를 따 춘곡의 집이라 불리기도 하다. 감사하게도 상시 개방되어 있어 골목여행자이 둘러볼 수 있다.
고희동 가옥에서 한 블럭 아랫길로 계속해서 걸어가면 북촌2경에 해당하는 원서동 공방길에 들어서게 된다.
전통연공방, 홍벽헌지형공방, 궁중음식연구원 등이 들어서 있는데 계속해서 정비 중인 골목이라 풍경이 근사하지는 않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더 안쪽에 위치한 빨래터나 한샘 디자인 연구소가 더 볼만 하다 여겨진다.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 보면 아직도 물이 흐르고 아낙들의 수다가 들릴법한 빨래터가 나온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마을마다 빨래터가 냇가를 중심으로 있었을테지만 창덕궁에서 흐러 나오는 물이라는 점에서 마을사람들이 더욱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 담너머가 바로 창덕궁 후원이다.
빨래터 좌측으로 언덕을 오르면 원서동 백홍범 가옥과 한샘 디자인연구소가 맞닿아 있다. 두 곳 모두 개방하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밖에서 보기에도 특색있는 한옥의 멋을 자아내는 곳이다. 빠르게 원서동을 한바퀴 돌아본 글이지만 천천히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골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