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유현은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누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답할만한 것은 독서뿐이었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소설을 읽는 것이 유현이 가장 즐겨하는 행동이었다. 여느 때처럼 혼자 들어간 도서관은 고요했다. 유현을 반기는 오래된 종이의 냄새는 안정적이었고, 신중히 책을 고르는 손길은 즐거웠다.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책장 사이를 걸어 다니던 유현의 손길이 멈춘 곳은 혼자 반대로 꽂혀 있는 책이었다. 평소였으면 지나쳤거나 꺼내서 제대로 꽂아 두고 지나갔을 유현이지만, 왜인지 모를 이끌림에 책을 꺼내 표지를 살폈다.
“너에게 주는 마지막 계절”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제목은 유현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음을 굳힌 유현은 책을 들고 언제나 앉던 구석 자리로 향했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구석자리는 아늑했고, 평온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보이는 창문 너머는 푸른 호수가 자리했고, 해 질 녘에는 오묘한 노을이 반겼다. 유행하는 무선 이어폰이 아닌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튼 뒤 읽는 책은 언제나 마음 깊이 남았다. 유현은 책을 읽기 전 표지를 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표지가 책이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살펴본 표지는 서정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어두웠다. 우울, 혹은 음울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두 칙칙한 표지는 책의 내용이 마냥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라고는 예측할 수 없게 하는 듯했다. 어쩌면 새드 엔딩일지도. 유현은 순식간에 책으로 빠져들었다. 틀어 둔 노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책과 동화된 유현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 순간을 깬 건 있을 리 없는 접촉이었다. 화들짝 놀라 한쪽 이어폰을 빼자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은 한 남자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것 같은 남자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꽤 놀란 유현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쪽지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쪽지에는 청소년 남자답지 않은 꽤 유려하고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책, 제가 빌리려고 했던 책인데 없어져서 찾아다녔어요.
혹시 언제쯤 다 읽으실 수 있을까요?
꼭 읽고 싶어서요.
고개를 다시 들자 보이는 것은 안경에 가려진 꽤 간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마침 꽤 재미있게 읽고 있었던 터라 당장 책을 주기에는 아까웠던 유현이 고민하다 가방에서 펜을 꺼내 쪽지에 답을 적었다.
지금 재미있게 읽고 있어서 당장은 드리기 어려워요.
오늘 안으로는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고 싶으세요?
남자의 글씨와는 다르게 귀여운 유현의 글씨가 웃기는지 쪽지를 받아 든 남자가 살풋 웃었다. 꽤 빠른 속도로 남자가 망설임 없이 답을 적어 내렸다.
010-2705-7644 이거 제 번호예요.
근처에 있을 거니까 다 읽으시면 연락 주세요.
쪽지를 받아 든 유현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고맙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천천히 일어나 유현에게서 멀어졌다. 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 유현은 쪽지를 가방 속에 펜과 함께 넣었다.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데 느껴지는 이질감에 꽂았던 이어폰을 다시 뺐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느낀 것은 미묘한 향의 변화였다. 살풋 코를 스치는 나무의 향은 꽤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오히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유현은 다시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현이 책을 다 읽은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가량이 지난 후였다. 오른쪽으로 돌린 고개에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호수였다.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밖을 응시하던 유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 본 그 남자였다. 호수가 꽤 가까이에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남자는 호수 앞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직도 코 끝을 맴도는 듯한 나무 향을 떠올리며 유현은 꽤 빠르게 짐을 챙겼다. 가방을 메고 책을 손에 든 채 유현은 호수로 걸어갔다. 노을이 지는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유현이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남자가 앉아 있는 벤치에 다다르자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뒤를 돌았다.
“안녕하세요, 책 다 읽어서요.”
“아, 연락 주시지. 그럼 제가 갔을 텐데요.”
“아니에요, 창문 밖으로 앉아 계시는 걸 봐서요. 여기 책이요.”
“감사해요. 내용은 어때요? 잠깐 앉으세요.”
“그럴까요?”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유현이었으나 그 남자와는 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색함이나 어려움 따윈 없이 부드럽고 즐겁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유현이 자연스레 웃음을 띠게 만들었다.
“책이 꽤 슬프더라고요. 울 뻔했어요.”
“그 정도로 슬퍼요? 그냥 사랑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계절을 준다는 말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이야기예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요. 새드엔딩이랑 가까운가요?”
남자의 질문에 유현의 고심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정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지 골똘히 고민하던 유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심장이 아프고 안타까운 새드엔딩보다는 순응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에요.”
“재미있겠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저녁 어때요? 저 지금 꽤 즐겁거든요.”
“저랑요? 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데...”
“전 재미있는데, 어때요?”
“음.. 그래요.”
유현은 전과는 다르게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인생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큰일이 생겼을 때, 혹은 책을 읽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이것을 감정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라고 하기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라서.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에 유현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싶어졌다. 하루쯤 일탈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이 왜 이러는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현은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평온했던 호수에 던져진 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파장이 끝없이 울려댈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