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붉은 자몽 에이드

by 백은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음식점은 꽤 분위기 있는 장소였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외형부터 예쁜 벽돌로 된 레스토랑. 가격대가 꽤 있을 듯한 장소였지만 앞서 들어가는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많이 와 본 장소인 듯 익숙해 보였다.

“앉으세요. 너무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왔나 싶네요.”

의자를 빼주며 손짓하는 남자에 고개를 살짝 숙인 유현은 남자의 말에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한 번쯤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반대편에 앉은 남자가 유현의 말에 유현처럼 입술에 예쁜 호선을 그렸다.

“다행이네요. 드시고 싶은 것 보시고 알려주세요.”

“네, 감사해요.”

남자가 건네는 메뉴판을 천천히 읽어내리던 유현의 얼굴에 전보다 더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침 먹고 싶었던 자신이 좋아하는 파스타가 메뉴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현의 수줍은 미소를 본 남자가 가만히 보다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시는 메뉴가 있나 봐요?”

“아, 네. 파스타가 좀 먹고 싶어서요.”

“좋죠, 여기 파스타 맛있어요”.

“그럼 전 토마토 파스타로 할게요.”

“네, 저도 같은 거로 해야겠어요. 마실 거는 뭐 하실래요?”

“음, 자몽 에이드요.”

“그럼 전 청포도로 해야겠어요. 메뉴판 저 주실래요? 제가 주문할게요.”

“네, 고마워요.”

유현에게서 건네받은 메뉴판을 덮은 남자가 다가오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정중하면서 꽤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유현은 마냥 다정하고 조용해 보이던 남자에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며 속으로 꽤 놀라워했다.

“저기요, 토마토 파스타 둘이랑 자몽 에이드 하나, 청포도 에이드 하나 주세요.”

“네, 토마토 파스타 둘, 자몽 에이드, 청포도 에이드 주문받았습니다.”

유현이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사이 남자는 인사하는 직원에게 꾸벅 절을 하곤 유현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꽤 놀란 눈치인 유현의 반응에 남자가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 다른 건 아니고 저랑 대화할 때랑 말투가 달라서요.”

그렇게 부끄러울 것 없는 말에도 유현은 수줍은지 귀가 달아올라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프시거나 불편한 건 아니죠? 귀가 빨개서요.”

남자의 질문에 유현의 귀가 순식간에 더 달아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유현의 말 끝이 덜덜 떨렸다.

“아니요, 안 아파요. 그냥, 제가 부끄러움이 좀 많아서요.”

늘어나는 말꼬리는 유현의 부끄러움이 많다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현의 말에 남자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직원이 올려주는 에이드를 유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인사하는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고.

“아, 고마워요.”

“맛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자몽 에이드는 마셔본 적이 없어서.”

“여기 자주 와 보셨어요?”

남자의 말에 질문을 던지고 달아오른 열을 식히려 에이드를 마시는 유현의 눈이 점점 더 반짝거렸다. 자신이 질문한 건 잊은 채 꽤 기뻐하는 유현의 모습에 남자는 대답할 생각도 잊고 유현에게 곧바로 다시 질문했다.

“맛있어요? 표정을 보니 맛있어하는 것 같은데.”

유현은 아까의 부끄러움도 모두 잊은 채 꽤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열감이 다 내려가지 않아 붉은 홍조를 띤 양 볼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아까 저한테 여기 많이 와 봤냐고 물어보셨었죠?”

“아, 맞아요.”

“전 양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자주 왔어요. 여기와 보셨어요?”

“전 처음이에요. 항상 들어오고 싶긴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뭐랄까, 차려입고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 들어가기 좀 그렇더라고요.”

유현의 말에 남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목소리도 유현처럼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조금 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그래 보이긴 하죠. 막상 안에 들어오니까 엄청 그렇진 않죠?”

“네. 생각보다는 편한 분위기네요.”

남자도 그제야 자기 앞에 두었던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현이 아! 소리를 냈다. 그에 남자가 커진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자 좀 내려갔던 유현의 홍조가 다시 붉어졌다.

“다른 게 아니고, 아직 이름이랑 나이를 몰라서요...”

기어 들어가는 말꼬리와 어디에 둘지 몰라 방황하는 시선에 남자는 픽 웃었다.

“전 임서한이라고 해요. 나이는 열여덟 살.”

“전 백유현이고, 똑같이 열여덟이에요.”

“그럼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할까요?”

“응, 좋아.”

동갑이라는 사실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유현의 시선이 서한에게 멈췄다. 동갑이 아닌 상대를 마주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유현은 퍽 안심되었다.

“동갑일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되게 동안이네.”

“난 네가 키가 커서 가늠이 안되더라. 혹시 나보다 나이 많을까 걱정했어.”

“나이 많으면 안 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듯 한 서한의 질문에 에이드가 든 잔을 만지작대는 유현의 손이 분주해졌다. 서한을 보고 있던 눈동자는 점점 떨어지고, 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은 유현의 손 끝을 붉게 물들였다.

“말하기 불편하면 안 해줘도 괜찮아. 다른 얘기 할까?”

대답을 망설이는 유현의 모습이 난처해 보였는지 서한이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에 유현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급하게 들었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나 괜찮아.”

“대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어.”

어느새 또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유현에 서한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한은 너무나 기분 좋고 달콤한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간지럽히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오묘한 느낌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걸 생각하는 것보다 눈앞의 귀여운 존재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화,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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