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달빛
“그런 거였다면 다행이네. 그래서 답이 뭐야?”
“그냥, 동갑이 말하기도 편하고, 거리감이 안 느껴지잖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고작 일 년 차이인데도 좀 먼 사람 같아.”
“맞지. 학교 선배들만 생각해도 그렇잖아. 우리랑 다른 세계 사람 같고.”
“응. 그래서 뭐랄까, 불편하다? 그런 거 같아.”
“그럴 수 있지. 너랑 동갑이라 다행이다.”
“왜 다행인데?”
유현의 말에 곧장 대답하려던 서한의 말은 야속하게 일찍 나온 음식에 의해 가로막혔다. 둘의 앞에 놓아지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붉은빛 파스타는 유현의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입을 벌린 채 파스타를 내려다보는 유현에 서한이 피식 웃었다. 아까 자몽 에이드를 마셨을 때의 그 표정이라서, 어쩜 사람이 저렇게 투명할까 싶었다.
“유현아, 얼른 먹자.”
“아, 응!”
파스타를 먹은 유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랬던 눈이 빵빵해진 볼처럼 커진 모습에 아직 먹지 않고 유현을 바라보던 서한의 웃음이 터졌다. 유현은 갑자기 웃는 서한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오물오물 먹으며 서한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유현이 음식을 넘길 때까지 웃던 서한은 야, 하고 부르는 유현의 목소리에 웃음을 멈췄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아니 그냥, 너 표정이 귀여워서. 미안해.”
말은 미안하다지만 전혀 미안함을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밝은 목소리는 유현의 약을 올릴 만했다. 그러나 유현이 투정을 부리지 못한 것은 귀엽다는 말 때문이었다. 귀여워서 라는 말 하나에 유현의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유현이 멍하니 멈춰있는 것조차 바라보며 웃던 서한은 급속도로 달아오르는 유현의 귀와 얼굴을 보며 그제야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서한이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동안 유현은 상황을 인지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굴에 열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을 땐 서한이 자신에게 귀엽다고 말한 것이 사고과정을 오랜 시간 끝에 거친 후였다.
“너,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응? 너 귀엽다고. 근데 유현아 일단 먹고 얘기해. 너 그거 한입 밖에 안 먹었어. 다 식겠다.”
“어? 어 응.”
식은 음식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 유현은 다시 허공에 멈춰있던 수저를 움직였다. 자신의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에 유현의 입꼬리는 끝을 모르고 솟아올랐고,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중간중간 자몽 에이드를 먹을 때마다 청량한 탄산에 몸을 움찔거리는 순간조차 유현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일찍이 다 먹고 유현을 보던 서한의 얼굴에도 어느 새부터 웃음이 서려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에서 나온 유현과 서한의 사이는 한참 가까워져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 웃음이 멈추지 않고, 둘 사이에 거리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우리 기말 공부도 같이 할 거지?”
“당연하지. 이번에도 내기할래?”
“아 싫어. 네가 어차피 이기잖아.”
“에이~ 네가 이길 수도 있잖아.”
“야야 기만하지 마.”
함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 기간을 보내고, 3학년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노는 것이라 다짐하며 둘은 1년의 마지막 날에 만났다. 자신이 이제 수능을 준비할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유현은 사뭇 싱숭생숭해 보였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던 유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왔어?”
고개를 살짝 더 위로 들자 보인 서한의 얼굴에 무표정이던 유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볼록 올라오는 광대와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서한도 함께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사람 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내일이면 수능 준비를 진짜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기분이 이상해서.”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잖아? 그니까 잊고 노는 거지.”
“맞지. 오늘 뭐 할까?”
“생각 안 해봤는데. 하고 싶은 거 있어?”
“나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냥 지금 정하지 뭐.”
호숫가에 앉아 발장난을 치며 무심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둘이었지만 모든 순간에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있음을 유현과 서한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 아이라면 행복한 미래를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할 정도로, 유현과 서한은 이젠 서로의 부재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소중한 관계였다.
굳이 특별한 곳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유현에게 맞추어 둘은 자주 가던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 다시 호숫가의 벤치로 향했다. 그 벤치는 둘의 인연이 제대로 시작된 장소이자 둘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늦은 겨울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진 하늘과 대비되는 호수의 달빛이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겨울치고는 쌀쌀하지 않은 날씨에 둘은 실내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앉아 있기로 했다.
“오늘 달 진짜 예쁘다. 엄청 밝네.”
“그니까. 슈퍼문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보름달이 아니니까 슈퍼문은 아니지 않을까?”
“몰라, 나도 그냥 들어만 봤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둘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다음 해가 오기 한 발자국이 남은 시간까지도 유현과 서한은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 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유현이 고개를 조금 떨구며 숨을 내뱉었다.
“왜?”
“1분 남았어.”
“그렇게 기분 이상해?”
“응..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도야.”
살짝 떨어진 유현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서한이 입을 굳게 물었다 떼었다.
“유현아, 고개 들어 봐.”
바로 전의 말과 달라진 서한의 말투에 유현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황이 서린 유현의 눈에 서한이 손을 뻗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화난 거 아니니까 그렇게 놀라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놀래라. 뭔데?”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 주는 서한의 손길을 받으며 초롱초롱한 눈길로 서한을 올려다보는 유현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글지글 끓는 듯한 이상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서한의 품에 안겨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