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 말

by 백은월

“정말 오래전부터 고민 많이 했어. 나 혼자 마음 편하자고 우리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평소와는 다르게 머뭇거리는 서한에 유현의 충동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직감이 불길에 부채질하듯 유현을 부추기고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유현이 서한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서한을 본 유현이 얕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대로 유현은 자신의 옆에 있던 서한의 품에 안겼다. 도서관에서 느꼈던 쌉싸름한 나무의 향과 차가운 겨울의 향이 유현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다시피 안긴 유현에 서한은 굳어 버렸다.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입안을 간지럽히고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은 동글한 뒤통수를 쓰다듬고 싶은 열망에 휩싸여 온몸이 타올라 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방황하던 손은 결국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해 유현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차갑고 조금은 버석한 머리칼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쓰다듬는 서한의 손길에 유현은 다시 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깨에 파묻고 있는 얼굴을 들면 곧장 서한과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아 눈을 꼭 감고 안겨만 있는 유현에 서한이 얕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살짝 올라가는 서한의 어깨에 유현이 감고 있던 눈을 뜨자마자 서한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유현의 얇은 팔을 감싸 쥐었다.

“유현아, 고개 좀 들어봐. 얼굴 보고 말하고 싶어.”

서한의 한 손에 다 잡힐 정도로 얇은 유현의 팔을 서한이 아주 약하게 흔들었다. 앙탈이라도 부리는 듯한 서한의 행동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유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얼굴 보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심장이 뛸 말인지, 유현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서한에게 들릴까 걱정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열감과 세상에 둘 말고는 아무 존재도 없는 듯한 조용함 속에서 들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부끄러워진 유현은 아주 조금만 고개를 올리면 보일 서한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왜 나 피해, 안 보여.”

“너 일부러 그러지...”

“뭐가 일부러야. 그냥 너 얼굴 보고 싶은 건데?”

능글맞지만 거짓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진지한 서한의 말투에 입술을 앙다문 유현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라진 달빛과 가로등빛이 가로막혀 생긴 그림자에 서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서한이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항상 보던 예쁜 미소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더 마음에 날아와 박히는지, 요동치는 심장에 유현은 당장이라도 자릴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유현이 부끄러움과 낯선 감정에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서한은 그런 유현을 가만히 내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지나 유현을 비추는 가로등빛에 보이는 터질 듯 새빨간 귀에 서한의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고, 얇은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은 유현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움직여 댔다.

"유현아, 진짜 나 안 봐줄 거야?"

꽤 애절한 서한의 목소리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깊게 숨을 들이쉰 유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보다 환해진 달빛에 서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고, 서한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이 보였다. 거울인 양 투명하고 맑은 서한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올곧은 시선 끝에는 유현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눈을 진득하게 마주하고 있는 유현에 서한이 기쁜 듯 웃어 보였다.

"드디어 보여 주네, 이 예쁜 얼굴을."

"이때까지 많이 봤으면서 꼭 그래야겠어?"

툴툴대는 유현이었지만 그래도 계속 마주치고 있는 눈에 유현도 어느샌가 부끄러움보단 행복감이 앞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얼굴 보고 말하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 말할 수 있어."

"뭔데?"

서한의 말에 대한 답은 질문이었지만, 유현은 어렴풋이 서한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알고 있었다. 낯간지럽고 책에서나 볼법한, 혹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지만 주위에선 흔하게 보고 듣는 그 말. 봄날의 꽃들처럼 향기롭고 여름의 풀잎처럼 싱그러우며 가을의 단풍처럼 화려하고 겨울의 흰 첫눈처럼 반가운 그 말. 그 말을 서한이 할 것이라고 유현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서한의 눈을 바라보는 유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현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고 싶은 감정보단 서한이 하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빛나는 서한의 눈동자로 그 진심을 느끼고 싶어서 피하지 않았다. 고요가 둘을 감싼 그 공간에는 서로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바람 한 점조차 방해할 수 없는 그 오묘한 순간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떨려왔고, 기대되었다.

"내가 널 좋아해, 유현아. 아주 많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화,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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