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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May 20. 2024

그런 순간들이 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각인되리라 예감하는

누구에게나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있는 인생의 반짝반짝했던 몇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꼭 아름다웠던,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박제된 듯 머릿속에 각인되어 살아가며 끊임없이 다시 재생되는 장면들..

예를 들면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긴장감 속에서 율동을 하다가 군중 속에서 똭! 엄마를 발견했는데 환하게 웃어주시던 그 순간의 장면이라든지, 더운 여름날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 문득 바라본 나무에서 매미가 끊임없이 맴맴 울고, 뜨거운 공기 속에서 문득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라든지,

학창 시절 봄날의 어느 날, 5교시의 나른함 속에서 창가의 하얀 커튼이 바람에 거대하게 부풀어 풍만한 가슴처럼 봉긋해져 있던 순간이라든지, 아기가 나를 보며 처음 웃어주어 벅차올랐던 순간이라든지..


무엇이 인생의 특정 장면장면들을 뇌리에 박히게 하는지 (어떤 기억은 그저 흘러가게 두고, 어떤 기억은 강렬하게 변환되어 저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0대의 언젠가부터는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구나.'


엄마가 된 후로도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아이는 만 7살이던 작년 처음으로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고 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연습하다가 어설픈 성공을 했지만, 겨울이 닥쳐 완전히 잘 타게 되지는 못한 채 다음 해가 되어버렸다.

전국의 예정된 벚꽃축제들이 다 미뤄질 만큼 누구도 예상 못한 꽃샘추위가 지나자 날은 급속도로 따뜻해졌고, 바람 빠진 아이의 자전거를 수리하고 다시 연습에 돌입했다. 이제 뒤에서 잡아줘야 할 단계는 지났지만 코너를 부드럽게 돈다거나 조금 속도를 내어 탄다거나 원하는 순간 잘 멈추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한데,  빨리 셋이 같이 타고 싶은 성급하신 남편 덕에 자전거 도로가 있는 천변에서 한번 시도했지만 양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다른 자전거들이 무서워 멈추기를 여러 번, 결국 포기하고 산책을 했다.

그리고 하교 후 몇 번 더 아파트에서 연습을 하고 두 번의 주말이 지났다. 어느새 아이는 자전거를 즐기며 쌩쌩 타고 있었다. 좁은 천변 말고, 더 넓은 길이 있는 다른 천변으로 다 같이 제대로 타러 가보기로 했다.


해가 지고 있는 저녁 무렵, 과연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 나는 어른도 탈 수 있는 우리 집 킥보드를 챙기고, 남편은 따릉이를 빌렸다. 천변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전거 도로가 있긴 하지만 찻길이라 내가 아이 자전거를 타고,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갔다.

드디어 출발점에 도착.

새로 사준 하얀 헬멧을 쓴 아이가 귀엽다. 본인도 설레는 표정이다. 기념사진을 한방 찍고, 드디어 역사적인 레이스를 시작했다. 아이와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고 나는 킥보드를 타고 뒤따랐다. 너무너무 잘 탄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이의 속도는 남편에 비해 당연히 느리지만 넘어지지 않고 쭉쭉 잘 나아간다. 바람을 가르며 가버려서 킥보드 따위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허벅지가 터질 것만 같아서 쫓아가다가 그만두고 나도 킥보드를 묶어두고 따릉이를 빌릴까 하여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남편과 아이가 돌아왔다. 남편의 핸드폰도 내 가방에 있었기에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상기된 표정의 아이는 어느새 제 아빠와 한편이 되어 나를 비난한다.


"쪼금만 더 오면 우리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남편이 타던 따릉이를 내가 타고 남편이 킥보드를 타기로 한다. 아이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청계천변을 달린다. 문득 벅찬 감정이 치솟는다.

아이가 아직 갓난아기였던 시절 아이 얼굴을 물끄러 바라보며 '이 아이가 웃으며 '엄마~'하며 불러주는 순간이 오긴 할까?' 생각했던 순간,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닥쳤던 순간,

아이가 말을 배워갈 땐 '엄마 사랑해'라고 처음 말해줄 순간을 기다렸고, 그 순간이 예상하지 못한 순에 갑자기 왔을 때의 울컥했던 순간,

아이가 좀 더 자라 처음 혼자 밖에 나가 심부름을 해왔을 때의 벅차고 뭉클했던 순간순간들이 떠올랐다. 하찮은 운동신경을 물려준 것 같아 미안했는데, 몇 년 전 보조바퀴를 단 채 처음 자전거를 타던 순간들이 흘러지나 가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두 발 자전거를 아이와 나란히 타고 있다. 어느 순간 아이는 더 훌쩍 커서 나를 뒤로 한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기도 하다.

아이에게 말한다.


"아리야, 엄마가 너랑 이렇게 나란히 자전거 타고 있으니까 막 벅찬 감정이 든다."


아이는 입꼬리를 늘리며 빙그레 웃는 것 같았다.


조금을 더 달리다가 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오른쪽 도로 연석 아래로 내려갔다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다시 그 연석을 뛰어넘어 원래의 주행도로로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올라오려고 시도하다가 자전거와 함께 고꾸라지며 나뒹굴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무릎이 좀 까지고 허벅지에 커다랗게 멍이 들었다.


감동의 순간은 시퍼렇게 기억되겠지만, 어느새 훌쩍 큰 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나란히 자전거를 타며 잠시 마주 보았던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연속 재생될 것이다. 그날의 자전거 타기 딱 적당한 온도의 밤공기와, 아이가 입었던 연한 오렌지빛 후드집업과 하얀 헬맷을 쓴 귀여운 모습과 세트로.



외국인 언니 막 날라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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