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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Jun 07. 2021

그깟 손세정제가 뭐라고

승질머리 탐구

라떼는 말이야.

뽀얀 거품 나오는 손세정제 따윈 없었어.

집이나 학교나 은행이나 그 어디서도 타원형의 고체비누만 있었지.

간혹 세제인지 비누인지 분간이 어려운 물비누가 있는 공중화장실도 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or 언제부터 만들어진 건지 / 수입된 건지 혹은 문화적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누르면 거품이 바로 나오는 손세정제가 가정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코로나라는 역병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손을 박박, 자주 닦게 되었지.

손소독제 외에도 손세정제가 불티나게 팔렸고, 특히 아이 있는 집에서는 손세정제 리필형 정도는 물티슈와 함께 언제나 쟁여두는 품목이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고체비누가 인류의 문화에서 사라질 듯 말 듯 하면서도 그 명맥을 이어오며 결코 집안 화장실 안 캐비닛이나 팬트리 구석 어딘가에서 쌓인 채 좀처럼 사라질 수가 없었던 거야.

솔직히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물건인데도 끊임없이 선물세트에 단골 메뉴로 등장했고, 심지어 '수제비누 만들기' 같은 것을 공방에서 수업하기도 하고(관상용 비누의 등장!), 더 나아가서는 환경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용기 사용을 줄이기 위해) 고체 바 형태의 일종의 비누인 '고체 뷰티 바' 같은 걸 쓰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집 화장실 안에서도 역시나 대여섯 개 정도 쌓인 채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그 고체비누를 걸레 빨 때도 쓰려고 하나 꺼내 두고, 속옷 빨래용으로도 하나 꺼내 둬도 1년이 가도 줄어들지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나는 여느 때처럼 생활비를 월초에 미리 다 닦아 쓰고 빈털터리가 되었고, 마침 거품형 손세정제의 리필도 똑 떨어진 그 어느 날이었어. 나는 쿠팡에서 리필형을 사는 대신 만원이라도 아껴보겠다고 고체비누 하나를 꺼냈어.


 런데

'라떼의 고체비누'와 거품 세정제의 세정력 차이는 1도 없을 텐데 왜 나는 갑자기 그걸 쓰게 되었지?



비판 없이 대세에 따라온 나를 반성하며 (그리고 생활비를 아꼈다는 보람과 함께) 당당하게 고체비누 하나를 까서 세면대 위에 올려두었어.

남편에게 앞으로 거품형 손세정제는 싱크대 위에서만 쓰겠다고 선언했지.

설거지하고 나서나, 양파껍질 까고 나서 등등.. 주방에서도 손세정제가 필요한데, 물 뚝뚝 흐르는 비누를 둘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야.

사소한 변화였기에 아이와 남편은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고, 나는 화장실 캐비닛 안 고체비누가 다 떨어질 때까지 손세정제를 사지 않을 작정이었지.


얼마간 평화로운 날들이 지났어.

그리고 아이의 친구와 친구 엄마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오게 된 날, 나는 바깥 화장실을 간단하게 청소하며(안방 화장실은 손님이 올 일이 없으니 절대 하지 않지) 그 후 생활비가 리필된 뒤 주방용으로만 산 리필형 거품 손세정제 하나를 뜯고 말았어. 화장실 캐비닛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버리지않고 빈통으로 모셔져있던 손세정제 플라스틱 용기에 쪼르르 리필형을 붓고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청소를 마치고 나왔어.





그 찰나의 순간 내 마음에선 어떤 의사결정 과정이 일어났을까?



-내 아이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 모든 집에서 다 쓰는 거품형 손세정제도 하나 없는 왠지 불우(?)해 보이는 집안 사정-이라고 고작 6살인 아이 친구가 생각할까 봐 두려웠을까? 그렇다면 내 아이를 위해서? 아니면 그 아이 엄마의 시선 때문에?


결국 나는 생활비에 쪼들리는, 궁지에 몰린 신세가 되자,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와 명분이 필요해서 '환경보호'와 '알뜰한 주부' 프레임을 가져왔고, 남편과 아이에게는 그 프레임을 내세우면서 그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도 속인 거였어.



결국은 이 작디작은 이슈가 나에게 남긴 것은 나라는 사람에 본질에 대한 한 면을 알게 된 것일까?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의식해서 순식간에 (어느 순간엔 소중하고 중요했던) 명분을 잽싸게 갖다 버리는 그런 얄팍하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이 나인가?


글을 쓰다 보니 명확해졌다.

나는 역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ㅋㅋㅋㅋ

핑계는 필요 없다.

알았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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