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는 한동안 병원을 찾지 못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이 몇 달간 계속되었고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몸이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인식한 뒤에는 과배란을 세 번 더 진행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인지, 배란 유도는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과배란을 유도하는 클레미펜의 개수를 늘리고 배 주사의 용량을 늘렸건만 배란일은 자꾸 미뤄질뿐더러 난포는 더디게 자랐다.
결과는 실패, 실패, 실패였다.
과거 그 해엔 코인 노래방과 인형 뽑기가 유행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 부부는 매일 같이 상가 2층에 새로 생긴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감성 발라드를 열창했고 나는 음울한 모던락을 불렀다.
노래방의 가격은 한 곡에 오백 원, 세 곡에 천 원이었다. 평일에는 이천 원을 내고 각자 세 곡씩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기분이 좋으면 한 사람당 여섯 곡까지도 불렀다.
노래방 기기가 활기찬 목소리로 "백 점입니다!"라고 외치면 기기 옆에 만 원짜리 지폐를 올려두기로 한 규칙도 있었다. 오늘 노래를 잘 부른 사람이 노래방 비용을 낸다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남편이나 나 둘 다 만 원을 낼 일이 드물었으나 날이 갈수록 돈이 쌓여갔다. 어느 날은 여섯 곡 중에 세 곡이나 백 점을 맞았을 정도였다.
노래를 부르고 난 다음에는 해안 도로를 따라 걸었다.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 모퉁이에 있는 무인 가게에 들러 인형 뽑기에 도전했다. 재미있는 건 손재주가 좋은 남편은 옆에서 응원하는 역할을 맡았고 실제 인형 뽑기에 도전한 건 나라는 점이었다.
나는 인형 뽑기에 징그럽게도 재주가 없었다. 눈대중으로 자리를 맞추는 것도 못 했고 운도 없었다. 총체적 난국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형 뽑기 잘하는 법' 같은 것을 찾아보지도 않았으니 실력이 늘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매일 같이 인형 뽑기에 도전했고 매일 같이 작은 지폐를 날렸다. 남편은 그런 내게 굳이 훈수를 두지 않았다.
오늘은 못 뽑았지만 내일은 뽑을 수 있을 거야.
그런 당연한 말로 나를 위로했다. 나도, 남편도,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둘 다 내심 알고 있었다.
오늘은 안 됐지만 내일은 될 수 있을 거야.
이는 비단 인형 뽑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나와 당신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말임을 말이다.
계속된 인형 뽑기의 실패는, 내가 '임신'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도 실패할 수 있다고, 실패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봄과 긴 여름, 가을이 흘러갔다.
남편이 휴직 이야기를 꺼낸 건 낙엽이 하나 둘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난임 휴직이라는 것도 있던데,
휴직하면 어떨지 한 번 생각해 봐.
처음에 나는 남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일을 '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애당초 나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몸이 정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쉬는 것이야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아이를 갖지 못할 뿐 몸에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남편은 재차 휴직을 권했다.
난 네가 계속해서 스트레스받으면서 버티는 게 싫어. 이런 제도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쉬면서 몸부터 회복해.
6년 전 내가 학교에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난임 휴직'이라는 사유로 휴직한 선생님을 보지 못했다. 그때는 학교의 분위기가 지금보다도 훨씬 엄격하던 때였다. 거기에 더해 내가 근무하던 지역의 문화는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몸이 아파서 병조퇴를 올릴 때도 교감 선생님의 눈치를 봐야 했고 일반 조퇴는 꿈도 못 꾸었다. 근무하던 학교는 한 학년당 3학급이 전부인 작은 규모여서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쉬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니.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하고 뻔뻔한 인간이 못 되었다.
하지만 나보다 5년을 더 산 남편은 나보다 더 현명했다. (더 정확히, 우리 부부는 '현명함'을 발휘하는 분야가 달라 내가 우둔할 때 남편은 현명해지고, 반대로 남편이 우둔하게 굴 땐 내가 현명해진다.)
남편과 나는 초임 발령지가 같았고,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관리자 분들은 우리의 첫 학교에서 같이 알게 된 분들이었다. 남편은 망설임 없이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그 주가 지나기 전에 음료수를 사 들고 우리 학교 교무실에 찾아왔다. 그리고 난임 휴직에 대한 승낙을 얻어냈다. 나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을 그는 너무도 손쉽게 해낸 것이었다!
나의 난임 휴직은 그렇게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