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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May 10. 2020

때가 묻은 느낌

내 안의 상담소1

이것은 한 성격파탄자의 부끄러운 고백. 어느 해 설이 되는 자정 즈음의 이야기다.


평소 술을 잘 먹지도 않는 나지만 그날따라 클라우드 맥주가 땡겼다.


패딩 코트 하나 걸치고 슬리퍼 차림으로 터덜터덜 집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알바생은 친구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 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아가들아.. 잘 있었니?


맥주와 함께 고른 과자랑 불닭볶음면을 골라 계산대에 놨다.


알바생이 “신분증 가지고 계시죠?”라고 했는데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신분증을 갖고 있냐는 말이 아니라 신분증을 소지한 성인이냐는 물음으로 착각한 것이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네? 없는데요?”

“없으면 못 사요”      

“저 정말 성인 맞아요”


아무리 우겨봐야 소용없었다. 알바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꼬리를 달싹였다. 그의 입에서 ‘내가 너 같은 사람 한두번 당해봤는지 알아?’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나의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제가 어딜봐서 미성년자에요? 됐어요. 안 살래요”


물건들을 계산대에 그냥 두고 편의점 문을 나서는데 뒤통수에 들리는 한마디.


“아, 싸가지 없어..” 알바생이 옆에 있던 자신의 친구에게 나에 대해 한 말이었다.


순간 너무 불쾌해서 뒤돌아 그에게 얘기했다.

“다 들리거든요?”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편의점 유리문을 닫는데 알바생의 목소리가 귀에 왱왱거렸다.


몇 초 전에 봤던 그의 표정이 뇌리에 스쳤다. 부리부리한 큰 눈, 어린 나이로 보임에도 반쯤 벗겨진 머리숱. 그런 사람에게 한밤중 인적드문 골목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욕을 듣다니, 너무 무서웠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동생에게 그대로 말을 전했더니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너, 너무 공격적이야”, “알바생이 충분히 싸가지없다고 느꼈을 수 있겠다”


댕- 하고 뒷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이 몰려왔다.


엄마와 동생은 낮에도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까칠하게 대했다고 했다. 뷔페 건물에서 만난 직원에게 이 건물 3층에는 뭐가 있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다. 직원은 2층과 1층에 있는 시설물에 대해 답했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3층에는 뭐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 말투가 퉁명스러웠다고 했다.


무서웠다. 내가 언제 이렇게 시니컬한 사람이 돼 버린거지?


처음 알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게 더 큰 무서움이구나.


나도 모르는 새 내가 거칠고 철판 두껍고 목소리만 큰, 괴물이 돼있었다니!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걸까. 아마도 큰 목소리를 내는 게 문제 해결에 빠르다는 것을 알게 돼서이지 않을까. 화나면 화난다고, 답답하면 답답하다고 표현하지 못했던..그래서 다음부턴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할 말은 해야겠다고 다짐한 지난 날들. 그건 잘못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배우 송중기가 KBS 연기대상에서 상을 받고는 연기하면서 때가 묻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나에게도 그때 그 순간이 때가 묻었다고 생각이 든 날이었다. 살면서 묻었던 어떤 더러움보다 잘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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