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스테이플러, 공책 등 문구류의 파란만장한 연대기를 다룬 <문구의 모험>(어크로스·2015년)에 따르면, 연필은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태어났다. 케직 근처 들판 가운데 있던 큰 참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흑연 광맥이 노출됐고 흑연 막대기는 최초의 연필이 됐다. 연필은 1560년대에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흑연봉을 나무 몸통에 넣은 현대식 연필은 16세기 후반께 모습을 드러냈다.
연필이 있으면 연필깎이도 있어야 하는 법. 그 이전에는 칼 등으로 연필을 깎았다. 연필깎이는 19세기 무렵 등장했다. 1828년 프랑스 리모주의 베르나르 라시몬이 최초로 연필깎이 특허를 냈고, 19세기 중반이 되자 작은 휴대용 연필깎이가 대중화됐다. 미국 출신의 20세기 대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디를 가든 꼭 공책 한 권, 연필 두 자루, 연필깎이 하나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연필깎이는 연필을 집어넣고 손으로 돌리면 칼날이 나무껍질을 얇게 깎아주는 지금의 휴대용 연필깎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기계식 연필깎이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 무렵이고, 전동식 연필깎이가 개발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문구의 모험>을 쓴 제임스 워드는 연필과 연필깎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연필깎이는 연필에 생명을 불어넣지만 동시에 연필의 생명도 점점 소멸시킨다.” 더불어 연필이 없다면 연필깎이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만다.
연필은 뾰족하게 깎으면 쉽게 부러지고 납작하게 깎으면 금방 닳는다. 생각 없이 돌리기만 하면 손에 잡기 어려운 크기의 몽당연필이 되고 만다. 모순과 공생의 관계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균형이다. 연필이 더 이상 필요없다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데 연필 없이 연필깎이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