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by 조각보자기


아빠, 잘 지내? 장대비가 쏟아지던 가을 날, 아빠를 뜨거운 불에 태웠다가 차가운 흙에 묻었고, 많은 이들이 빗물에도 감춰지지 않던 눈물을 흘렸지. 그로부터 어느덧 1년이 지났네. 적적하던 토방에 앉아 아빠의 부재를 실감하고, 아빠가 그리워 진즉에 흙이 돼 버렸을 무덤가에 갔다가, 그새 빽빽해진 추모공원 부지를 걱정하며 떠들고 돌아왔던 시간들.


겨우내 적적했던 엄마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노인 일자리와 농사를 시작했고, 그놈의 삼치밭, 젊은 나도 하루 한 번만 가고 싶은 거기를 하루에도 두 세번씩 오가며, 마늘이며 고추, 녹두, 깨…

다행히 여름에 귀여운 강아지가 새식구가 되서 엄마는 요즘 거기에 마음을 주고 있어. 나와 안서방은 회사 일로 바빴고, 그러면서 틈틈히 가족들은 만났지. 엄마와는 여러 번 나들이도 했어. 나는 흰머리와 관절 통증이 조금 더 늘었지 뭐야.


아빠가 떠난 이후로 다행히 변함없는 일상이었어. 누구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아빠를 기억하는 가족, 친척들이 있다는 게 위로가 돼. 아빠 덕분에 우리는 더 자주 모이게 되고, 자주 연락하게 됐어. 이번 추석은 오랜만에 해남집이 북적북적 할 것 같아.

근데 또 아빠만 없어. 우리 가족이 조대병원에 모였을 때도, 광주에서 1박을 했을 때도, 수국이 만개한 집에 내려갔을 때도,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도, 우린 다 있는데 아빠만 없어. 아빠만 안 와. 아빠 때문에 이렇게 모였는데, 정작 아빠는 못 와. 그리운 이들을 만나는 건 기쁘지만 아빠가 없는 건 참 슬퍼. 분명 아빠도 이 자리에서 함께였으면 좋아했을 텐데, 살아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야.

하지만 어디선가 아빠도 지켜보며 웃고 있겠지?


아냐, 사실 난 유물론자라서 인간이 죽으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야. 그래서 무덤가에 가는 것도 무슨 의미인가 싶어. 거길 가도 아빠 손끝 하나 만질 수도 없고, 말을 한다고 아빠가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굳이 추석에 같이 차례 지내면 되지, 다음날 또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싶단 말이지.

아빠는 신기하게도 생일이 설 전날이었는데, 이제 제사도 추석 다음날이야. 우리 편하라고, 먼길 두 번 다녀가지 말라고 그런건가? 그렇다고 해도 난 제사는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아. 그런 형식과 의례를 갖춤으로써 아빠를 추억하고 떠올리자는 게 본질이겠지. 그래서 제사를 앞두고 나도 이렇게 편지를 쓰잖아.


아빠, 작년에 내가 가졌던 보호자로서의 부담과 책임감과 죄책감 등은 이제 많이 지웠어. 특히 그 결정, 재활병원이 아니라 해남종합병원으로 아빠를 데려갔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고 가정해보던 것도 이젠 의미가 없어. 그 과정이 조금 다를 순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아빠는 우리를 떠났을 거라 생각해.

차라리 이렇게 마침표를 찍은 뒤에 아빠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시간이 마음은 더 편안한 것 같아. 왜냐면 '아빠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이미 종결 처리된 일이니까. 그저 온전히 그리워하고 회고하는 일이라서 솔직히 나는 부담이 덜해.


언제나 힘든 건, 죽음이란 게 현재 진행형일 때야.


가령 엄마가 그런 셈이지. 다행히 아직 정신적으로는 큰 문제 없이 건강하시지만. 어찌나 농사일에 진심인지, 늘 가자고 하던 아빠 산소에도 여름엔 바쁘다고 안 가더라구. 신기하지. 점점 우리는 아빠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심지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인간은 아무리 슬퍼도 조금씩 나아지게 설계되어 있다는 게 실감 나. 어쨌든 아빠랑 엄마는 그렇게 죽고 못사는 잉꼬부부는 아니었으니까, 엄마는 천천히 모셔가. 엄마는 아빠 몫까지 더 살고 싶대. 더 풍요롭고 좋아진 세상이라나 뭐라나.


아빠, 나는 이제 새로운 죽음이 와도 그게 인간의 숙명임을 알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또 어떨지 모르겠어). 아무튼 머리로는 알아. 최근에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깨닫고 나를 괴롭게 하는 집착과 성냄을 떨쳐내려 노력 중이야. 苦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삶은 딱 견뎌낼 수 있게 짜여져 있으니 나는 누가 죽어도, 심지어 엄마라도, 슬프겠지만 또 출근하고 밥 먹고 일하고,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주어진 내 인생의 끝을 향해 이 시간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걸 알아.

허나 이렇게 알게 됐고 어쩌면 제법 평온하게 남은 날들을 살 수 있다고 해도, 아빠와 몇 마디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만은 여전한 슬픔이네. '아빠-'라고 불렀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는 게, 이글을 쓰며 아빠와 대화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혼잣말이라는 게 조금 슬프네.


그래도 걱정마. 요즘은 주어진 시간은 다 살고 아빠 옆으로 가겠다고 마음 먹곤 해. 어떤 날은 진짜 너무너무너무 외롭고 헛헛하고 적막해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기도 하지만, 그 역시 무상하다는 걸 이제 알았으니까, 그런 감정도 흘러가고 지나갈 거란 걸 배웠고, 조용히 기다리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제 아빠의 부재는 나에게 견딜 수 있는 슬픔이야.


1년 새에 이렇게 각자의 생활로 바빠진 남은 자들은 조금씩 더디 모여 울겠지. 마침내 나는 아빠의 얼굴과 목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런 날들까지 충분히 견뎌 볼게. 내 몫을 잘 살아내고 언젠가 내가 아빠 옆에 가게 되면, 거기에는 영원한 이별 같은 게 없길 바라.

그러니 아빠, 미래에서 기다려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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