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우리는 이 질문들을 '잠시 멈춤 질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흘러가버리는 감정에게 '잠시 멈춰!'라고 외치고 그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이니까요. 나를 만나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감정에게 질문하며 친해지다 보면 더욱 잘 활용하는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의 기술', 김윤나)
얼마 전부터 감정이 복잡할 때마다 '감정 노트'를 적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 뒤에 숨은 진짜 감정들을 찾아서 이름을 붙여주었다. '감정 노트'에 처음 적힌 일은 이랬다.
사무실 전화기에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차장님의 이름이 떴다. 반가운 마음에 울리는 전화기를 들었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어~그래. 조차장.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차장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응 나도 뭐 그냥 똑같이 지내지. 다름이 아니라 작년에 성능평가 보강공사 담당했던 분이 누군지 알아?"
"아마 관리파트 쪽에서 담당했을 텐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별건 아니고, 그때 공사하면서 시공사랑 문제 있거나 한 건 없는지 물어보려고"
"아. 그러시군요. 제가 한 번 담당자 확인해 보고 전화를 드릴게요"
"그래그래. 고마워. 잘 지내고"
친분이 있는 차장님이셔서 확실히 알려드리고 싶었다. 바빴지만 직접 담당자를 확인하기 위하여 경 과장님 자리로 갔다.
"과장님, 혹시 작년에 성능평가 보강공사 담당하셨었나요?"
"네에."
"대구경북본부에 김 차장님이 전화 왔는데, 당시에 시공사랑 혹시 문제 있었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다른 걸 더 물어보실 수도 있으니까. 과장님이 직접 김 차장님께 전화 좀 해주시겠어요?"
"(나를 쳐다보더니) 이제 자리가 아주 좋아지더니 적극 행정이 아니라 소극행정을 하시네요"
평소 경 과장님이 쓸데없는 말로 장난을 많이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하기도 해서 평소 같으면 웃고 넘길 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자리를 옮겨서 등 뒤에 캐비닛만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자리가 좋아서 일할 때 집중적으로 하고 쉴 때도 자유롭게 쉬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뜨끔함과 동시에 어이가 없어서 얘기했다.
"전화 돌려달라는 거 일부러 확인하러 온 거예요"
평소 싫은 말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기분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단지 조금 크게 중얼거렸다.
내 대답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경 과장님은 다른 얘기를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얘기에 일부러 웃으며 맞장구치듯 대화를 하고서 자리에 돌아왔다.
기분이 묘했다.
소극행정을 한다는 말에 찔렸던 걸까. 분명히 기분이 나빴는데도 그걸 얘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 과장님 얘기에 맞장구를 치며 억지로 웃기까지 했다.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 기분은 감춘 채 다른 사람의 기분에 맞췄던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쓸데없는 말을 잘하는 분이니까 그냥 넘기자'
'요즘에 내가 진짜 일을 소홀히 하고 자주 놀았나?'
'내가 괜히 예민한 건가?'
'다음에 어떻게 똑같이 갚아주지?'
객관적으로 생각할수록 항상 수다를 많이 떨며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경 과장님보다는 내가 일을 많이 했었다. 복잡한 감정을 나도 알기 힘들었다. 문득 '감정 노트'가 떠올랐다.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를 펼쳐서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 '지금 이것이 어떤 감정일까?'
1. 처음부터 김 차장님의 전화는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 직접 경 과장님께 내용을 확인했다. 소극행정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행정을 한 것이었다. 더 잘하려고 했던 행동이 었는데 오해를 받아서 억울하다.
2.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내가 소극행정을 한다고 느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3.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방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기분을 맞춰주고 돌아온 내가 답답하다.
4. 나보다 일도 열심히 안 하는 사람한테 평가를 받는 일이 당황스럽다.
5. 경 과장님이 진짜 내가 일을 안 하는 걸로 알까 봐 불안하다.
감정들을 적어 놓고 보니 생각보다 다양해서 깜짝 놀랐다.
억울함, 답답함, 당황스러움, 불안함이 섞여서 무슨 감정인지 모른 채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질문. '이것이 내게 말해주는 건 무엇일까?'
1. 그동안 적극 행정을 하려고 '적극행정 O, 소극행정 X'라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포스트잇에 적어서 모니터 앞에 붙여놨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일 처리를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보다 내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극행정을 하는 거 아니냐며 던지는 말이 더 억울하게 느껴졌다. 잘하려다가 오히려 일이 틀어질 때 더 억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내 기분을 털어놓지는 못할 망정 남의 기분을 오히려 맞추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심각하게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 질문. '이 감정을 충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경과님께서 어떤 부분에서 내가 소극행정을 한다고 느꼈는지 직접 물어본다.
세 번째 질문에 답을 적은 후 용감하게 경 과장님께로 갔다. 표정과 행동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대화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과장님께 따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커피잔을 들고 어슬렁 거리듯 다가갔다. 과장님 자리로 가보니까 핸드폰으로 영상을 열심히 보고 계셨다.
마음속에서 '이것 봐. 지가 나보다 더 일 안 하면서 누구보고 소극행정이래!'라고 외쳤다.
휴. 마음을 가라 앉히고 과장님께 가볍게 말을 걸었다.
"오. 과장님 뭐 보세요?"
"보복 운전 영상이요"
"그러시구나. 과장님 근데 아까 제가 어떤 부분에서 소극행정 한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호탕하게 웃으시며) 하하하. 아, 농담이에요. 농담. 진짜 농담이에요"
"그러셨구나. 저는 일부러 적극 행정 한 거예요. 김 차장님께 전화만 돌려드렸어도 되는데 직접 물어보러 온 거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과장님이 저보고 소극 해정을 한다고 그러셔서 당황했어요. 제가 생각보다 다른 사람 말에 예민해서 자꾸 과장님 얘기를 곱씹었네요. 제가 보기와 다르게 마음이 좀 여려요. 호호호"
"그래요? 흠,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불러 드려야 되나. 여린 마음 조차장님?"
"아녜요. 아녜요. 괜찮아요. 저한테 아무 별명도 붙이지 말아 주세요. 하하"
용기 내어서 꺼낸 나의 진짜 감정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기분이 금방 풀렸다. 조금 전만 해도 억울함과 당황스러움, 답답함이 섞여서 요동치던 감정이 금세 가라앉았다.
이렇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면 감정은 더 이상 마음을 휘젓지 않고 사라진다. 반면에 존재가 확인되지 못한 감정은 출구를 찾을 때까지 마음 어딘가를 떠돌면서 계속 생채기를 낸다. 그래서 슬픈 건지, 아픈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른 채 살아가면서 점점 더 감정에 무뎌지게 된다.('말 그릇', 김윤나)
'감정 노트' 덕분에 소중한 나의 감정에 이름을 제대로 붙여주고 떠나보낸 것 같아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