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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은WhtDrgon Oct 07. 2021

<게임기획자는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김동은WhtDrgon. 211007 #게임기획자하얀용

안녕하세요, 하얀용 김동은입니다.

오늘은 회상, 회고, 넋두리, 그리고 항상 바라보던 빛나는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지루할 수 있지만 같은 별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몰라 긴 글을 기억을 더듬어 적어보려 합니다.


1. 2400AD의 꼬맹이.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지만 스티브 잡스가 제가 태어날 때 근처인 1977년에 애플 2 컴퓨터를 발표하고,  저는 1983~4년에 처음으로 APPLE ][ K+라는, 지금 생각하면 세운상가 복제품 같지만, 아무튼 애플 컴퓨터를 가지게 됩니다. 그때는 자각이 없었지만 저는 일찍부터 애플 유저였던 셈이지요.  

 그리고 어느 날 (마찬가지로 복제품이었던) 2400AD가 울티마 4보다 약간 먼저 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인공지능 로봇들이 지배하던 우주 도시를 해방시키는 게임이었습니다. 사이버펑크 삘도 조금 나는, 여러모로 너무나도 일찍 새로운 세상이라는 경험에 눈을 떠 버렸죠. 그날 이후 저의 꿈은 오늘까지도 게임과 '미지의 세계'로 정해져 버렸습니다.


(실제 게임이 이렇게 생기진 않았습니다. 이건 제 오마주 작품입니다. :) )


2. 컴퓨터 통신의 동호회장.

그리고 1988년 중학교 때 애플2,MSX,SPC같은 8비트 컴퓨터의 시대가 가고 16bit 컴퓨터(지금은 64비트죠.) 그리고 1200자네트 모뎀과 함께 열린 신세계. 한국경제신문이 서비스하다 한국통신KT에 팔려 하이텔이 된 케텔ketel. 그리고 천리안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메타버스의 열풍은 이미 이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세계의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밤낮에 관계없이, 지역에 관계없이. 그리고 동네에는 있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


많은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나를 존재로서 사랑해주는 것에 있는데 바로 그런 개같은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죠!!! 저도 거기서 한마리 흰둥이가 됩니다. 하얀용이란 닉네임은 그 때 만들어집니다. 아이디가 8글자 밖에 안됐기 때문에 whtdrgon이란 닉이 됐죠.


저는 그때부터 게시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등의 기능적 요소보다는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그 삶에 푹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점의 저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 만들 고민만 하며 게임 코딩들을 따라 쳐보며 많은 책들을 읽고, 공부하고 판타지 소설을 써서 '천리안 컴퓨터 문단(go debut)'에 ZBDEBU26 작가아이디를 받아 데뷔하고, 하얀 로냐프 강을 쓰셨던 이상균 님의 판타지 동호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대 시솝(SYSOP:게시판 관리자의 약자.총책임자.)도 해보고. 그리고 천리안에 '검과 마법 동호회'를 창립하다고 전화비 13만원에 지친 아버지는 집에 co-lan을 깔아주고.... 저는 당시 비쌌던 천리안에서 무료였던 작가 아이디로 바람의 나라 그리고 MMORPG의 아버지 송재경님의 텍스트 머드게임 쥬라기공원을 신나게 플레이하죠.


3. TRPG의 던전 마스터

https://namu.wiki/w/TRPG#rfn-31 

TRPG 나무 위키 한국 TRPG의 역사에 제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맹세코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 )

한국 TRPG의 태양 최경원 님을 만났던 저는 '미지의 세계'를 상상이 아니라 게임 규칙을 따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에 눈을 뜹니다.

TRPG는 테이블 토크 롤 플레잉 게임의 약자로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적. 혹은 해커, 첩보원, 스파이, 우주전사들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스터라고 불리는 사람의 시나리오 진행에 반응하며 주사위를 굴려 적을 명중시키고, 피해를 입히고, 임무를 완수하는 집단 게임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GURPS, 콜 오브 크툴루 등이 당시 RPG 동호회 출신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초여명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어 있습니다.  

 TRPG는 마찬가지로 제가 태어날 때쯤인 1976년 D&D이후 왕국, 직업, 모험가들의 집단, 마법주문, 전투기술 이 모든 것들을 수동으로 진행하는 게임으로 울티마라는 유명한 컴퓨터 RPG 게임의 습작명은 DnD#이었습니다. Dnd#28번은 아카라베스라는 게임이 되었고, 이 게임은 울티마가 되고, 울티마 온라인이 되고, 며칠 먼저 나온 넥슨의 바람의 나라와 함께 MMORPG 세계를 만들고, 리니지가 탄생하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게임들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5년 당시의 하이텔 RPG 동호회를 창립했고, 이후 환상특급이라는 팀을 만들고 전국 3개 지부 11개 팀이 만들어졌고, 수많은 TRPG 팀과, 그 팀에서 게임 진행을 주관하는 '게임 마스터들 (MMORPG에서 게임 운영자를 칭하는 GM의 유래입니다.)'이 육성됩니다. 저 역시 토요일, 일요일, 수요일. 쉬지 않고 시나리오를 짜고 월드를 만들고 설정하고 진행하며 문자 그대로 몇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저는 게임 매거진에 TRPG 담당기자로 입사하고, 각종 기사를 쓰고 D&D 한글판 출간에 관여하고, 로도스도 전기라는 소설로 유명한 '소드 월드'의 출간에도 관여하고, 매직 더 개더링 수입사와 연을 쌓고, 정말 화려한, 그리고 처참한 성적의 시대를 지내게 됩니다.  이때 RPG동호회의 수많은 마스터들이 나중에 대거 게임기획자가 됩니다. (지금은 더 멋진 것을 만드시는 리니지의 설계자 KHJ님! 보고계신가요?)


그리고 컴퓨터 게임이 만들고 싶어서 '전자계산기 공학과'에 들어가게 되죠. 정보처리 학과나 컴퓨터공학과와 다른 것은 칩을 설계하고 줄이고 직접 각종 칩들을 박아서 프로그램을 수행한다는데 있습니다. 당시 오락실 게임은 기판으로 이루어져 있었거든요.  지금은 큰 쓸모가 없어졌습니다만, TRPG와 함께 기계라는 것 장비라는 것의 추상화 아랫부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반 지식이 되어 있습니다.


4. MMORPG 게임기획자

병역특례를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필수인력이었던 프로그래머는 아니어서 이리저리 쫓겨나다가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넥슨의 바람의 나라 시나리오 퀘스트 외주 작업자. 그것도 여러 사정으로 2-3일 출근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렸던 것을 마지막으로 군대에 입대합니다.

군대에서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의 성공을 보며, 아 저기 있어야 했는데 하며 내무반 복도를 닦다가 망연자실하게 TV를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많은 책을 봤던 것 같습니다. 내부반에 각종 처세술 책들, 인생에 대한 자기 계발서들은 넘쳐났고 그걸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정말 많은 내용들, 게임 개발계획, 게임 설정들을 갱지를 접어 빼곡하게 적고 적었지요.  


전역 후 국내 최초의 3D MMORPG '아타나시아' 프로젝트에 기획팀장으로 합류합니다. 학생들이 간혹 교수님의 신입은 어땠나요?라고 물어보면 난 신입일 때가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웃음)  

그리고 지금도 서비스되는 2D MMORPG 믹스마스터 기획팀장이 되고, NHN Games의 3D MMORPG '아크로드'의 게임 기획자가 되고, 그 하이텔을 서비스했던 KTH 신규개발팀에 기획팀장으로 입사하여 수많은 (출시되지는 못한) 게임들을 기획하고, 그러다가


 일본 소학관의 프로젝트에 기획팀장이 되어 일본의 설정 프로세스, 지적 재산과 월드 프랜차이즈를 지키는 5권에 이르는 규정집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 마치 TRPG 설정집과 같았던 그것. 법적 부분뿐 아니라 캐릭터의 의상과 색상, 등장 방식 등 작가의 요구사항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 규정집이었죠.  그렇습니다.  TRPG 월드 가이드, 룰북, 캠페인 세팅, 이 규정집이 바로 '하얀 용의 세계관 프로세스'가 추구하는 목표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MMORPG기획자가 저의 스펙트럼 중 하나의 색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얼마나 소중하든 나의 모든 색이 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5. 게임 기획사의 대표 게임기획자.

게임 기획자로서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개인사업자로서 창업합니다. 이 '하얀용 스튜디오'는 월 매출 천만까지 올리다가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입사 제안을 하셔서 딱히 인수합병비용은 없고, 그냥 사장 포함 전 직원 3명의 집단 입사로 끝을 맺습니다.  미약하지만 제 첫 번째 창업 기록입니다. 세금계산서라는 것도 처음으로 떼어봤고, 나중을 위해 복식부기도 배우기도 하고 그렇게 되죠.


6. 프로젝트 데미안의 기획 기획자.

그리고는 '아타나시아'에 감명받으셨던 안재광PM님의 제안으로 '프로젝트 데미안'에 기획팀장으로 합류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정말 멋진 프로젝트였거든요! 프로젝트 데미안의 기획자라고 6항을 배치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비록 중국자본이 점유한 A사에서 다른 대형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같이 접힐 위기에서 팀은 독립 계획을 진행합니다.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서 데이비드 찬도 만나보고,  회사는 엑토즈, 이네이블, 나우콤(아프리카 TV), 위너스 게임즈를 따라 흐르게 됩니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어요. 각오했던 일이니 상관없긴 합니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당시 기자셨던 오의덕 님이 기사로 남겨주셨죠.

https://www.inven.co.kr/webzine/news/?news=40712


7. 대학 강단의 게임기획자.

이 시점 2011년에 저는 "게임 기획, 게임의 미래는 문화 콘텐츠를 가득 품은 졸업생들에게 있다."라는 주장을 펴다가 KK대학교에 문화콘텐츠학과를 만드신 김기덕 교수님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KK대학교 게임 기획론 전공 3학점에 빛나는 강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어설프디 어설픈 이 강사 경험은 2012,13...2017년 다른 대학교까지 겸임교수로 이어집니다만, 이때 느낀 바가 있어 이 강의를 끝으로 본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임 기획을 교육적으로 쪼개고 가르친 경험은 지금도 학계와 산업계를 동시에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때 대학원에도 입학했는데 아직도 졸업을 못하고 있어서 정의준 지도교수님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만... 매년 매년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도전해야 할 날이 계속되고 있어서 계속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8. 게임기획자가 아닌 안게임 기획자.

그 뒤 '삼재'라고 우기고 있는 저의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이래저래 많은 분들께 민폐를 끼치고, 돈을 떼이기도 하고, 뭐하나 되는 일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들어간 N모사의 등대 지하실 같은 곳에서 게임 개발의 막장을 경험하고 이 길에 대한 회의감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저는 지금도 지키고 있는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다.  

'나는 나의 기술을 믿고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들, 조직들과 비즈니스 적으로 함께 할 수 있어도 불합리한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신을 위한 예의가 아니다. 충실한 노예의 삶은 그것을 돌파할 벽돌을 쌓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인이 비게임 회사에서 게이미피케이션을 제안을 했을 때 바보 같기도 '아직은 게임 개발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억이라도 주면 모를까.'라고 대답하게 됐죠. 그래도 이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억 앞에는 장사 없다'라는 좌우명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MCN 업체에서 저는 게임의 경험과 이 개인 팬덤의 경험이 결합하여 게임의 미래를 엿보았다고 믿습니다.

2015년의 그때 모든 콘텐츠는 국민에게 화폐를 발행하는 사업이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96767484659869


그리고 6개월 만에 회사를 나와 '쇼 엔터테인먼트 시네마틱 게임'이라는 것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창업 각오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떤 대책도 없었지요. 그렇게 1년 반.  제 삼재의 끝 2017년이 다가오는 겨울.


9. 쇼 엔터테인먼트 시네마틱 게임기획자.

운명같이 그 프로젝트를 만나게 됩니다.  실은 그전에 한 번 뵈었는데, '그때 아이돌 게임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란 질문을 받아서 'IP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유튜브든, MCN이든, 아이돌이든 그 안에는 세계가 있고 사회가 있고, 지식체계와 신용과 인생이 있는데, 사람들은 빠순이, 게임중독자, 드라마 중독자, 오덕, 광팬이란 이름으로 무시하기 급급하고, (저는 어떤 무례한 자로부터 동은씨는 애낳지 마라. 애가 태어났는데 아빠가 쓰레기 오덕이면 어떻하냐라는 말을 들어봤습니다. 없는 애까지 만들어서 패드립을 치는 그 숙련됨은 정말 다른 의미로 존경할만 했지요. 저런 인생도 있구나. 그럼에도 이 코멘트를 남기는 이유는 여러분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에는 나의 감정을 갈취하려들지만 정작 가치는 없는 별별 존재들이 많습니다. ) 많이 사면 팬사인회 추첨해주면 된다는 수준의 이야기나 던지고 있을 시절이었거든요. 헌정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존경의 표현이 필요했습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님 한분과 저 밖에 없었기 때문에 팀을 빌딩 하고, 아이돌 게임이라고 안 오려는 기획자를 억지로 설득하다 지쳐서, 제가 신입으로 취업시켰던 기획자를 만나 면접 때 역 프로젝트 브리핑을 준비하고, 정성에 정성을 쌓아 사람들을 모시고, 촬영장을 뛰어다니고 (네, 그분들 직접 많이 만났습니다.) 게임 콘셉트를 만들고, IP사를 만나고, 맘에 드셨는지 그 IP사에 강사로 3회 정도 나가게 되고.... (10번의 팀장님을 이때 뵙게됩니다. 팀장님과는 지금도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메타버스를 설명드리고 있지요. 제가 손에 꼽을 수 있는 지식욕을 가지신 차분하고 우아한 분입니다. ) 그렇게 뭔가 게임인지 뭔지도 모를 무언가를 콘셉트, 팀빌딩, 촬영, 기본 프로토타입을 1년 만에 만들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구로의 N사가 퍼블리셔로 계약되고, 이 모든 우여곡절들을 통해 <BTS WORLD>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2016년에는 세계관에 대해 이런 글을 썼고요

https://brunch.co.kr/@whtdrgon/4?fbclid=IwAR3hZMxGCT8JbcMmxRteWf7BpPJTJb3ep6bu_vJ9G67H84qMUnGJANg8xNE2

취한 겨울 어느 날에는 이런 상념을 남겼습니다.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1307692679263574


2017년에는 세계관 관광사업을 꿈꿉니다.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1731490120217159

그리고 이제 모든 가수가 세계관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죠. 물론 딱히 동의는 못 받았습니다만.

(이것도 페이스북에 써놨는데 찾기가 힘드네요. 페이스북은 검색이 힘들어요.)


2018년에는 세계관에 대해 이런 정리를 끝냈죠.

https://brunch.co.kr/@whtdrgon/57?fbclid=IwAR3cvwZmTUZ2BqjgmemqMKUWPAqKfSzieFDbl6Aim1NVUK6kan4lfRjcMOU

그리고 게임 출시와 함께 저는 멋지게 엄청난 배수로 성장한 회사를 떠나 세계관의 최전방으로 나아갑니다.


10. 음악 회사의 게임기획자.

2019년 8월 그 뒤론 연말까지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동안 밀렸던 모든 것들을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위해.  10년 전 한 번쯤 상상했던 포클레인 운전 자격이랑 (3톤 미만 작은 겁니다. 이틀 교육 후 수료), 지게차 자격이랑, 모터보트 자격이랑, 1종 대형 버스랑. (그리고 이후 택시, 버스, 화물 자격도요.)  

 그리고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유명한 음악회사의 스토리텔링팀에 입사했습니다. 제 생각엔 여기가 세계관 최전방이었거든요. 게임기획자라고 스스로를 부르지만 게임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계관에 빠져있었으니까요. 그때 팀장님과 1년 정도. 혹시 더하면 2년. 1~2년 정도면 실패든 성공이든 어떤 식으로든 과업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을 나눴고 여전히 뭘 하겠다는 것인지 뚜렷하지 않았던 탓에 2020년 1월 3일에는 외주 작업자로 3개월 계약으로 합류하고, 3개월 뒤인 4월 13일에는 정직원 입사를 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세계관 라이브러리 파트장이 되고요.

 이전 회사에서 IP사와 개발사간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많은 것을 느꼈고 이것만 개선해도 상당한 퀄리티 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만, 제가 부족해서 그리 많은 것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워낙 다들 이미 훌륭하신 인재들이 모여계시기도 했고요. 나름의 세계관 프로세스를 정립했습니다만 과다 공수가 소요되는 탓에 실무에는 별로 적용되지 못했고요. 하지만 자료화와 프로세스에는 어느 정도 기여한 듯합니다. 일단 서브컬처에 대한 이해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다가오는 2021년 10월 12일은 제가 입사한 지 딱 1.5년이 되는 날입니다. 1~2년의 딱 중간이죠!


11. NFT 아티스트 게임기획자

21년 7월 20일에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시작했습니다.

그 흔적이 여기 있죠. https://www.facebook.com/whtdrgon/posts/4502367629796047  

그리고 저는 메타버스의 암호화폐가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생각한다'라는 존재 그 자체를 만들었다면.  NFT아트는 문화와 예술이 문명과 세계의 중심점이 되고, 여기에 사람이 모이고, 사회가 만들어지고, 건물이 만들어지는 역순의 거울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이 시점 즘입니다.

https://brunch.co.kr/@whtdrgon/84 

 그래서 메타버스를 논하는 다른 학자분들과는 달리 저는 현장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뛰어들었고 500명, 1000명의 작가들과 어울리며 NFT 아트를 시작했습니다.  

 제 작품들의 이미지 변천사는 여기서 보실 수 있고,

 https://www.facebook.com/media/set/?vanity=whtdrgon&set=a.4696662033699938

작품은 여기서 사실 수 있습니다. :)

https://opensea.io/collection/naming

그리 잘 팔리지는 않는데, 타이밍을 잘 맞춘 탓에 주관 제이플레이스기획 이윤 아트의 전시회에 작품을 냈고요.

https://www.instagram.com/p/CT33ZWWpf2h/?utm_medium=copy_link&fbclid=IwAR1KKWhx9gE9O5kHtPAOqgB8CtSgGgf-lg9RUlbcFyTijioBsmVdAhtVxKs

10월에는 홍대 전시회에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신청했고,

12월 크리스마스에는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획전에 작품을 내게 됐습니다.  

아티스트가 되진 않을 것 같아요. 전 게임기획자거든요.

하지만 메타버스가 무엇인가? NFT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지분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광로 같은 NFT 아트가 구체화되가는 그 복판에서 작품 팔아본 사람 중 하나가 되었거든요.  

5개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면 예술인 등록을 해보려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실체에 대한 경험을 얻고있죠.


12. 메타버스를 설계하는 게임기획자

그리고 12일은 제 퇴직일입니다.  세계관은 사실 2017년에 정리를 끝냈고, 실무 프로세스에 대한 부분도 2020년에는 설계가 끝났습니다. 내린 결론은 세계관을 포함한 전부를 설계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메타버스'의 존재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 중첩의 경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는 메타버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한 명쯤은 숫자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고, 제가 아니면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근자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페이스북과 만남을 통해 오래 이야기 해 온 것을 눈 여겨 봐주신 이장주 박사님 추천으로 명망있는 매체에 메타버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지요.



용어? 용어는 중요하지 않아요. 전산화는 회사 전산실 설치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스마트 도큐먼트로 대표되는 유기적 구조, 문서의 본질을 프로세스에 비트단위로 흡수시키는 과정이지만 결국 같은 말입니다. 천공카드와 VS최신 툴은 같은 것이니까요.  H/W와 S/W를 나누던 시절에서 지금까지 S/W가 다시 수많은 추상화가 진행되었을 분입니다.


혹시 궁금하신가요? 이 게임기획자는 그럼 다음은 어떤 주제를 추구하고 있는가?

2년 혹은 2.5년 뒤를 위한 제 주제는 "내 안의 부양가족. 그리고 그들만이 사는 세계"입니다.


메타버스를 나타내는 수많은 기술들과 과업들. 어떤 소설과 VR과 AI와 가상 캐릭터와 화려한 비주얼을 뒤로하고, 저는 비인기 게임이었던 2400AD의 꼬맹이 때부터 지금까지 '미지'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이제 그 세계를 직접 만들고 설계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제 메타버스를 설계하는 일을 할 거고요. 위대한 역사를 만든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의 다음 스텝인 '존재의 IP화'를 도우려 합니다. 선제적으로 움직이기는 기업들의 메타버스 설계를 도울 것이고요. 그리고 그토록 오래 꿈꾸어왔던 '한국을 멋대로 조각 내붙여버린 오리지널 IP'를 만들 겁니다.


그 인력들을 어디서 구하느냐고요? 제가 월급만 줄 수 있으면 될겁니다. 이 땅의 모든 기획자들은 마치 수능 공부를 한 학생들처럼 필요한 모든 지식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게임기획자는 세계관 제작자, 메타버스의 설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월급 받으며 매일매일 밤을 새 가며 하던 일입니다. 단지 프로그래머와 아트 디자이너가 아니라 음악, 영상, 애니, 소설, 드라마, 영화 그리고 우리의 전용 세계라 믿었던 '월드'를 위해 기획서를 쓸 뿐입니다.

40대 경력 20년이 넘으면 스스로 잡 디스크립션을 써야한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반응을 받은 글이 있는데 저는 제가 아닌 우리 동지들을 위한 창직을 하고 싶습니다. 게임기획자에서 세계관 기획자로.


13. 게임기획자는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글의 제목입니다. 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 답을 자신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웃음:) )


스페셜리스트에게 이 스페셜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대답해줄 사람은 회사도, 업계도, 조직도 아닌 나.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가진 이 스페셜함이 생계를 유지하고 꿈을 이루고 답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한 명이 꿈을 펼 자리는 있을겁니다.

그래도 누군가 게임 기획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함박웃음으로 '나?'라고 대답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켜보지 않으셔도 저는 걷고 있으니 부디 자주자주 빛나서 눈에 꾸준히 띄는 사람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한 고을의 선비가 되면 다른 고을의 선비를 벗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기획자 동지들. 꿈꾸는 모든 창작자들에게 기회와 준비가 함께 하시길.


김동은WhtDrgon.

211007

#게임기획자하얀용


표지사진 : Photo by Ravi Rosh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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