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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허게시리',
약한 것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by 이진순

『유배중인 나의 왕』에서 저자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은 끊임없이 변해서 늘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하는 일종의 문화양식이라고 말한다. 한 개인에 대해서든 어떤 집단에 대해서든 사회 현상에 대해서든, 깊은 질문의 과정이 녹아있지 않은 ‘정답’은 잘못된 것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많은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좋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최선의 해결책과 답을 내올 수 있는 능력이자 태도인 것 같다.


노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종종 우리는 ‘늙어가면 어린아이가 돼’라는 말을 많이 하고 듣는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부분적이다. 노인들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느낄 때나 뭔가 유치한 것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느낄 때,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치매가 있어 많은 것을 잊고 있더라도, 움직일 수 없어 거의 누워 지내더라도, 그 사람은 몇십 년에 걸친 자신의 역사를 몸에 품은 존재이다. 한 존재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에 대한 섣부른 규정 대신에 호기심이 자리 잡게 된다. 대화에서도 자연스럽게 규정하고 명령하는 말투 대신에 그 사람의 의사를 묻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덧붙이자면, 어린아이 역시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은 별 내용을 담지 않은 그냥 인상 비평 정도의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자연스럽고 깊게 서로에게 스미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의 인상을 비평하며 그것을 굳혀가고, 좌우로 동서로 남녀로 노소로 서로를 편 가르며 편견과 분노를 키워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를 부추기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존재할 것이다. 여튼 나는 친절한 명령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질문과 대화가 오가는 관계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너무 불안하지 않게 늙어가고 싶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에서도 내가 어머니를 다 알지 못한다는, 아니 아주 일부를 겨우 알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라도 되새기는 과정에서 조금씩 어머니를 다르게 보게 되는 것 같다. 좀 덜 건방져지고 좀 더 귀 기울이게 된다고 할까?


이전에 같이 TV를 보는데, 유기견을 보호하는 사람이 나왔다. 개를 키우다가 버려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 사람이 그런 버려진 개들을 데려와서 보호해주는 거라고 말했더니, 어머니는 “저런 사람도 이시난 저것들이 살지, 너랑 나랑만 이서시믄 어떵 헐거라(있었으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다.


“우리도 옛날에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워나신디(키웠었는데) 어머니는 동물 안 좋아해난?”

“난 별로 좋아해지지 안허여.”

"옛날에 우리 고양이 새끼 나신디(났는데) 교인들이 새끼들 하도 만져부니까(만져서) 새끼들 데령 집 나가분 거 기억나맨(데리고 집 나가버린 거 기억나)? 그 다음날 새벽에 어머니넨 새벽 기도 가신디(갔는데) 나 깨영(깨서) 우는 소리 들어주랜 창문 열엉(들어주라고 창문 열고) "고양이 고양이" 허멍 막 울어난(하면서 막 울었었어)~ 나중에 고양이 뒷집 지붕 속에 들어강 이신 거 알앙 나가 후라시 들렁 들어강 데려와서(들어가 있는 거 알고 내가 플래시 들고 들어가서 데려왔어)."

"경 해나샤(그렇게 했었니)?"

"응. 그땐 고양이 너무 좋아해나신디(좋아했었는데) 이젠 동물에 별 애정이 안 생기더라."


동물에 별 애정이 없다던 어머니는 가끔 마을 산책을 다니다가 예쁜 꽃이나 작은 동물, 아기들을 보면 “아이고~!” 하며 표정과 눈빛에 빛이 돌기 시작한다. 사람을 유독 좋아한다는 ‘자몽이’라는 이름의 개를 그 주인이 어머니 무릎에 올려줘서 한참을 안고 좋아하기도 했다. 동물 안 좋아하는 거 맞나? 잘 모르겠다. 난 ‘좋아한다’에 한 표를 보탠다.

2025_자몽이.jpg


하루는 운동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에 핀 갯패랭이꽃을 꺾어왔다. 병에 넣고, 가지 하나는 잘라서 작은 화분에 심었다. 예전에 잘라다가 마당에 심은 제라늄이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길래 이번에도 되려나 싶어서 심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다. 어머니에게 자랑하듯 꽃을 보여주며 설명했더니, 어머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이고 너 만낭 불쌍허게시리....” 그리고 조금 더 보다가 “잘 살아시믄(살았으면) 좋을 건디”라고 말했다. 예쁘다며 좋아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조금 의외였다.

2025_들꽃.jpg 마을길에 핀 들꽃들을 꺾어다 병에 넣고 화분에 심었다

생각해보니 여리여리해서 꺾어오는 동안 이미 시들해지고 병에 넣어도 살아나지 않던 개양귀비꽃을 보면서도, 어머니는 “불쌍허게시리...”라는 말을 했었다. 그렇다고 나를 탓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저 시들어가는 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아, 어머니는 약하고 여리고 귀엽고 예쁜 것들에 엄청 마음이 가는 사람인가 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드러진 들꽃을 솎아주는 정도로 조금씩 꺾어오는 건 괜찮지 뭐~’라고 생각하며 가끔 꺾어오긴 하지만, 어머니의 ‘불쌍허게시리’라는 말이 나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어머니는 나를 멈칫거리게도 하고 놀라게도 하면서,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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