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토끼 Oct 27. 2019

2. 사는 게 좀 무의미하면, 안 되나요?

잠깐만 길을 잃었다 오겠습니다

그런 기분 알아?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또 어제 같은 그런 기분.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회사를 다녔고, 그전에 또 다른 12년 동안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살았던 터라, 완전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이 하루를 설계해야 하는 경험은 정말이지 ‘난생 처음’이었다.


  누구보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었는데, 정작 하루를 내가 온전히 계획한 적이 있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잘 놀지 못하고,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또 어제 같은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


  그동안 나는 왜 일을 했지, 왜 회사에 다녔지, 왜 공부를 했으며, 무엇을 위해? 내가 생각했던 성공적인 직장인 선배의 모습은 정말 내가 원했던 모습이었나. 나름 하루하루 재밌고 바쁘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았는데,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느끼긴 했던 것인가. 내일이 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을 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답 없는 생각의 꼬리 물기.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기력감과 우울감. 나는 길을 잃었다.


  그런데, 길을 좀 잃어보기로 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또는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고 싶어지면, 그때 어떻게든 되겠지. 한동안 일어나고 싶지 않으면, 잠깐 무의미한 순간들도 보내보지, 희뿌연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으면, 안개가 지나가거나 내가 그 길을 통과할 때까지 조금만 있어보지 뭐.


  눈을 떠 보니 12시, 수면바지를 끌고 거실로 나가서는, 딱히 먹고 싶지 않은 밥과 밑반찬 몇 가지를 꺼내 먹고, 무표정으로 누워서 TV를 보다가, 해가 지면 또다시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 들어오고,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책을 폈다가 몇 페이지 못 읽고, 굳이 잠이 오지는 않지만 누워서 잠을 청하는 일상.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길을 잃어보겠습니다.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 지금은 흐리지만, 곧 선명해지겠지요.



(커버 이미지 :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 70년도 넘은 벽 사이를 뚫고 나온 풀 한 포기, 그저 눈에 자꾸 밟혀서.)



매거진의 이전글 1. 희생하고 참아야만 어른이 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