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토끼 Oct 11. 2019

불면의 기록

잠 못 드는 그 밤에 관하여

  올해부터 불면이라는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그는 거의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통에, 이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 나는 불면증이 있지. 의학적 용어로 수.면.장.애.


  잠 안 오면 책을 읽거나 TV를 봐, 하는 사람에겐 그랬다간 정말 매일 밤을 새우고 아침에 잠이 들게 될 거야, 하고 대답한다. 눈을 감고 양을 세 봐, 하는 사람에겐 눈을 감으면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바로 이 불면이다, 하고 대답한다.


  내가 이 불면이라는 녀석과 얼마나 더 공존하며 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 나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리라는 희망으로, 불면의 기록을 좀 남겨볼까 한다.


2019년 세비야 대성당 야경




  나는 피곤이 느껴질 때쯤, 보통 1시에서 2시 사이에, 침대에 몸을 눕힌다. 불을 끄고, 눈을 감지만, 피곤은 한데 그렇다고 잠이 들지는 않는다. 나는 오늘 하루를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감사기도(?)를 한다. 최근에 나는 자연스럽게 날라리 기독교 신자에서, 그래도 잠자기 전 기도를 하긴 하는 신자(?)로 복귀하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던 예전의 나는 어디 가고, 이때부터 뇌가 깨어난다. 오늘 하루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금 눈을 감는 이 순간까지의 하나하나의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구 엉켜 등장하기 시작한다. 점심에 만났던 그 선배는 왜 그 일을 하고 있을까, 내가 그런 벤처 일을 한다면 나는 적성에 맞을까, 내가 먹었던 커피는 좀 맛이 달랐던 것 같은데, 아, 그 커피를 먹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커피는 정말 건강에 나쁠까. 하루에 3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커피는 1잔으로 줄이라고 예전에 의사가 그랬었는데, 정말 줄여야 할까, 등등등. 마치 나의 뇌 속이 갑작스레 미친년 머리마냥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자, 이제 2단계가 시작된다, 일명 변신 단계. 

  그렇게 헝클어진 뇌는 윙~~~~~ 하는 기계음을 내기 시작한다. 윙~ 웽~ 왱~ 우웅~ 이상한 소리들이 내 방을 온통 메우고, 몸의 온 감각이 살아난다. 눈을 감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귀는 여전히 방 안의 온갖 소리를 흡수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움직이는 듯하고, 숨소리가 아주 민감하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 숨결에 따라 움직이는 내 배가 느껴진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하며, 심장 박동 수를 고스란히 느껴낸다. 갑자기 머리며 팔이며 발이며 온 몸이 간지럽기 시작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처럼 ‘이러다 정말 내가 다른 어떤 생물로 변신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내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다시 잠에 들기 위한 무한 노력이 시작된다.

이것이 3단계, 설득의 시간이다. 유튜브에 ‘수면 명상’을 틀어 놓고, 명상을 하려고 노력한다. 자, 눈을 조용히 감고 호흡을 시작합니다, 날숨 들숨, 또 날숨 들숨.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 소리를 들으며 나의 손가락을 느껴봅니다, 그다음엔 발가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 둘, 셋, 넷, 내 몸이 편안해집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젠장, 몸은 가벼워진 것 같지만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졌다.


  시계를 보면, 난 정말 오늘 잠을 못 잘지도 몰라. 시계를 절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4단계, 유체이탈 단계다. 머리가 멍해지고, (여전히 눈을 뜨고 있지는 않지만) 사방이 까매진다. 나는 우주에 떠 있는 것만 같다. 검은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이, 그래, 진공 상태에 있는 거야. 이 공간엔 나 혼자 있고, 내 몸은 자고 있지 않은 건 분명한데, 정신줄은 이미 놓은 것 같은, 몸과 정신이 분리된 듯한 상태에 이른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자고 있지는 않다.


  5단계, 그래 내 모든 걸 포기하겠어, 단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을 켠다. 책을 펴고 책을 읽는다. 핸드폰이나 TV를 보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모두가 잠든 그 조용한 시간(아마도 4시, 아니 5시, 아니 6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에 소설을 읽는다. 읽다 보면, 1시간 안에 나도 모르게 꾸벅하고 입질이 온다. 하하, 이 찰나와 같은 순간을 놓치면 안 되지, 하고 몸을 누인다.


  장작 대여섯 시간을 고생한 몸과 정신은 그제야 스위치를 끈다.  


2015년 밴쿠버의 야경. 눈을 감았을 때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불면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단계를 거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잔 게 언제지 싶을 정도로 불면은 어릴 적 가끔 눌리던 가위처럼, 나를 찾아온다.


  내가 불면이 생겼다고 이야기하면, 주변에서는 ‘나도 불면이 있어’하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런 고통은 정말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불면과 일면식도 없던 과거의 나는 상상도 못 했던 경험이니까.


  그런데, 불면과 함께 하는 현대인들이 이렇게나 많다면, 세상이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잠을 잘 수 있는 행복,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그리고 잠 못 이루는 밤, 그보다 외롭고 고독하게 무언가와 싸우는 순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불면을 물리쳐야 할까, 아니면 인정하고 같이 살아야 할까. 불면을 극복하는 날이 올까, 아니 그에게 ‘극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맞는 것일까. 오늘 밤에도 또 그 친구가 찾아올까. 글로 옮기고 보니, 조금은 친근해진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졸라, 외롭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