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지망생
‘그곳’은 완벽하다.
쾌적하고 안락하다. 보증금과 월세 따위는 없다. 공과금과 관리비도 마찬가지. 그토록 원하던 주방과 침실의 분리도 가능하다. 문단속에 열을 올리지 않아도 방범이 확실하다. 집에 있을 때는 식사가 제공된다. 무려 제철과일과 채소를 겸비한 건강식으로. 인품 좋은 집주인 내외는 항상 나를 자식처럼 대해주신다. 당연하다. 그분들은 내 부모이니까.
더할 나위 없는 그곳은 바로 '부모님 집'이다.
본가는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넓고 깨끗한 공간. 정신적 평온함. 경제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부모의 품 안에 귀속되는 것, 민망하지만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가 아닐까. 물론 즉흥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 더구나 ‘다시’ 함께 지내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고 꼼꼼히 따져야 하는 일이다.
내게는 오랜 시간 쌓여온 생활양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생수병에 입 대고 마시기, 샤워 후 알몸으로 나오기, 떨어진 머리카락은 퇴근하고 치우기 등.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지내지 않기에 만들어진 습관들이다.(또 대부분 엄마의 등짝 스파이크를 유발하는 버릇들이다.)
‘이제 나는 부모님과 영영 함께 살지 못하겠구나…'
자취를 시작하면서 이런 씁쓸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혼자 사는 것에 특화되어 갔고 독립된 일상은 익숙함을 넘어 당연함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어느덧 부모님과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편해지는 ‘미분리불안’ 증상까지 겪게 되었다.
이런 자식에게 캥거루족이 될 자격이 있긴 할까..?
아무리 가족이어도 타인이다. 부모님도 나 자신(본인)은 아니니까. 캥거루족이 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몇 날 며칠을 신세 지는 행위다. 집 안에서 내가 아닌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라도 말이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한번 자기 검열을 해보자.
그간 누렸던 방대한 자유를 반납할 수 있나?
->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귀가한다. 간섭을 받을 물리적 시간이 현저히 짧다.
엄마의 잔소리를 감당 가능한가?
-> 가능하다. 떨어져 산다고 잔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아니다.(원격으로 전달된 뿐이다.) 오히려 엄마의 레이더망에 존재함으로써 우려 섞인 말들을 적게 들을 수도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없을 텐데?
-> 괜찮다. 이제는 집안에 흐르는 정적이 지겹다. 혼자보다는 누군가의 방해가 나을 것 같다. 잠깐의 고독이 필요하다면 가까운 카페에 가면 된다. 휴가를 내고 잠시 여행을 가도 되고.
TV 채널 독점권을 포기해도 괜찮은지?
-> 오히려 잘됐다. 항상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가 문제였다. 쉬는 날이면 종일 예능과 드라마만 보느라 해야 할 일을 미루곤 했다. 앞으로 TV를 보지 않을 생각이다.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해보겠다.
이 정도면, 나… 캥거루족이 돼도 괜찮겠는데? 진심인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지인지 모를 답변으로 압박질문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일단은 합격선에 가까워진 것 같다. 비록 부모님과 살아온 경력이 단절된 '경단딸'이지만 그간의 공백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외쳤다.
나는 캥거루족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