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데뷔 임박
자취를 하겠다고 선포하던 날이 기억난다.
그날도 어김없이 1등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을 떠는 이유가 신입의 패기 혹은 직장을 향한 애정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지만 순전히 집이 먼 탓이었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 일찍 집을 나서면 지옥철을 타는 것으로 끝나지만 늦장을 부리는 순간 진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아직은 적막한 사무실을 모니터 화면만이 밝게 비춘다. 흰 바탕에 커서가 세 번쯤 깜박였을 때 키보드 위에 올라간 두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쭉쭉 글을 써 내려갔다. 내가 자취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런 출퇴근을 지속하게 되면 발생할 재앙에 대해.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그보다 심각한 나의 피폐한 상태에 대해. 어느덧 A4 두 페이지가 거뜬히 채워졌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모님께 프린트한 종이를 내밀었다. 길고 빽빽한 장문의 탄원서. 이쯤이면 다 읽었겠지 하는 순간에도 두 분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엄마는 마지막까지 나를 설득하려 했고, 아빠는 끝내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완강했던 나는 승낙을 받기도 전에 자취방 계약까지 마쳤다. 당시 아빠는 이사 당일까지 나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정말 힘든 투쟁 끝에 이뤄낸 값진 독립이었다.
다시 캥거루족이 되는 과정은 취업과 매우 흡사했다. 어떤 회사에 가고 싶은지, 직무가 적성에 맞는지, 지원 자격은 충분한지. 요모조모 따지고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나에게는 캥거루족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실무자들(선배 캥거루족)을 만나며 업계 동향도 미리 파악했다. 남은 건 임원(부모님) 면접뿐이었다.
최종면접은 별 부담이 없었다. 채용 과정상 구색 맞추기로 넣은 형식적인 단계일 테니까. 면접관은 부모님. 그것도 나의 첫 자취를 열렬히 반대하던 분들이다. 내가 다시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을 때, 당연히, 무조건, 얼씨구나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꼬장만 부리지 않으면 무조건 합격이다.
라는 대단한 착각을 했다.
"나… 엄마, 아빠집에 들어가서 살면 어떨까?"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께 내 의사를 살짝 내비쳤다. 합격이 확실한데도 면접이라는 분위기가 주는 중압감에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엄마는 얼마나 좋아할까. 아빠는 얼마나 반가워하려나. 나는 그들의 환영에 애써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두 분의 표정이 이상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 나는 면접관들의 포커페이스에 당황해 버렸다. 아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냥 집을 알아보는 게 어때?“
이 말은 즉슨, 본가에 들어오지 말라는 거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따로 지내자는 거다. 잠시 회로가 정지됐다. 나 떨어진 건가… 불합격이라고? 지원자님의 역량은 뛰어나지만 저희와는 인연이 아닙니다, 뭐 이런 거야 지금?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온몸의 교감신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황판단을 하느라 머릿속은 난리법석이었다.
부모님은 왜 떨떠름해하는 걸까. 내가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만큼 그들도 자유로운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가. 이런...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당연히 합격할 줄 알고 다른 곳에는 이력서도 넣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졌다. 다급해졌다. 불안해졌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금은 메타인지가 필요한 타이밍. 처음부터 고자세를 취할게 아니었다. 같이 살게 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슬쩍 떠보기식 질문을 하다니. 자식이라는 이유로 무한정 ‘갑’인 줄 알았지만 그 순간 나는 철저한 ‘을’이었다. 그들은 ‘집주인’이고 나는 ‘세입자’였다. 나는 적극적인 어필을 시작했다. 오래전 취준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근무지가 변경될지도 모르기에 이사할 지역을 선택하기가 애매하다.(회사 이전? 확실하지 않았다)
내 집 마련을 하기 전까지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하다.(자가구입? 그게 언젠데?)
내가 머무는 공간은 스스로 청소하겠다.(퍽이나)
그 외 기타 등등(매우 구질구질했다)
확실하지 않은 계획들이 마치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인 양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부족한 실력을 자신감 하나로 채우려는 지원자 같았다. 아마 면접관들은 눈치챘겠지. '아~ 저 친구가 급하구나' 하는 것을. 그들은 오랜 시간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독립 탄원서를 제출한 그때보다 더한 침묵이었다. 그 순간 세대주인 아빠가 다시 정적을 깼다.
“그래, 집으로 들어와”
합격을 했다. 다행히, 겨우겨우, 간신히 캥거루족을 허락받았다. 극적인 과정을 겪고 나니 본가에 더욱 애정이 생겼다. 그곳은 더 이상 만만하게 여기던 최후의 보루지가 아니다. 머물 수 있어 한없이 감사한 곳이다. 아, 이제는 ‘부모님 집’이 아니지?
앞으로는 '우리 집'이라고 불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