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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나름 쓸모 있는 자식입니다

캥거루족 2주 차

by 양독자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캥거루족은 단지 얹혀사는 자식이다?


그건 오해다. 개똥도 약에 쓰일 때가 있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아무 쓸모가 없을까. 분명 쓰임이 있다. 아니! 쓰여야만 한다. 이 집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캥거루족 2주 차. 나는 아직 눈치가 보였고,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생태계 대표 공생커플을 꼽으라 하면 ‘악어’와 ‘악어새’가 떠오른다. 사냥을 마친 악어의 이빨에는 제거해야 할 잔여물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악어새에게는 좋은 먹이가 된다. 악어가 입을 벌리면 악어새가 그 안으로 들어가 청소를 한다. 사실은 배를 채우는 행위에 가깝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로 살아간다.


우리도 이와 비슷하다. 부모님은 나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나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한다. 부모님은 악어, 나는 악어새. 우리도 공생을 시작했다.


악어와 악어새



아낌없이 주는 악어


캥거루족이 누리는 혜택은 엄청났다.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집은 있지만 집안일은 하지 않는 삶. 재벌집 딸이 부럽지 않다.(아니, 사실 부럽다.) 돈 많은 백수 다음으로 팔자 좋은 사람이 바로 캥거루족 아닐까.


부모님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 식. 주’를 제공해 주신다. 햇볕에 바짝 건조된 향기로운 ‘옷’. 갓 지어진 따뜻하고 맛있는 ‘밥’. 안전하고 냉난방이 확실한 ‘집’까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영역이 탄탄하게 지원되니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그중 으뜸은 단연코 '식'이다. 프라이팬에 구운 생선, 오랜 시간 푹 삶아진 돼지고기, 냉장고에 채워진 여러 종류의 제철과일. 혼자 살 땐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 특별식이 이제는 급식 메뉴 같은 일반식이 되었다. 육체적 배고픔은 물론, 정신적 허기를 달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부모님이 제공하는 무한리필 의식주 서비스.

내 평점은 ‘매우 만족’이었다.




악어한테 악어새가 꼭 필요해?


그럼 나는 어떤 일을 하냐고? 집에서 나만 할 수 있는 블루오션이 있다. 부모님이 하려면 버겁고 난감하지만 나에게는 꽤나 간단한 것들. 문제는 약간 귀찮다는 건데… 그들이 높여준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가장 먼저, 나는 그들의 ‘디지털 도우미’가 되었다. 재생되지 않는 넷플릭스 연결, 실수로 지워진 카카오톡 복구, 어플을 통한 보험금 청구 등. 그들의 전용 고객센터가 되어 실시간 상담을 진행했다. 수화기 너머로 지루한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 대기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딸! 이것 좀 봐봐”

이 한 마디면 해결된다.


다음으로, 나는 그들의 ‘중고거래 대리인’이 되었다. 안 쓰는 물건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그들은 곧장 중고거래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심지어 중독 증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팔리나?"

"이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을 진정시키는 역할까지 내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의 ‘쇼핑 MD’가 되었다. 나는 어르신들이 모르는 신통방통한 아이템을 슬며시 선보였다. 올리브영 판매 1위에 빛나는 혀클리너, 피부과 의사가 내돈내산 한다는 클렌징폼, 한번 쓰면 끊을 수 없다는 필터 샤워기.

”그런 게 효과가 있어?“

처음엔 심드렁해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신문물을 활용하고 있다. 특히 혀클리너는 쓸 때마다 감동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도움이 되는 자식이라니.

분명 우리 집에 쓸모가 있는 구성원이야!




얼마 전 나무위키에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했다. 사실과 다르게 악어와 악어새는 공생관계가 아니다. 둘은 기생관계다. 악어는 굳이 입 안을 청소할 이유가 없다. 사냥을 하며 잔여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악어새는 왜 악어의 입 안에 들어갈까? 악어가 내는 소리를 통해 천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고로 악어새가 악어에게 전적으로 기생하는 모양새다.


문득 부모님과 나도 기생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당연히 악어새인 내가 기생하는 쪽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이니까. 그럼에도 최대한 공생하는 자식이 되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얹혀사는 게 눈치 보여서? 살가운 딸이 되고 싶어서? 나 같은 자식밖에 없는 부모님이 짠해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부모님의 호출에 짜증을 내는 나란 존재.

이 정도면 기생자식이 아니라 기생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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