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사랑합니다!”_1

마흔 길 골목골목__ 여덟 번째

by 옹쓰복쓰

[대문사진설명_ 2017.04.30 돌 쌓인 성벽 아래 작은 꽃들: 어릴 적 거닌 그 성벽이 떠올라]







__ 홍성의 나지막한

__ 성벽 옆 풀벌레 소리가

__ 아스라이 들려오는 밤, 꺼내든

__ 내 일기장 속

__ 가족들의 옛 이야기들에

__ 간절한 소망이 담긴다. 그리고 미처

__ 다 건네지 못한 한 마디 “사랑합니다⋯⋯.”











마흔 길 골목골목__여덟 번째

"해진 일기장에 있던 건"



[2020.05.07 굳건히 선 나무: 나의 뿌리가 단단해짐을 느꼈던 그날이 떠올라]

























“아빠”라고 불러본 지가 얼마나 될까. 지금 나는 아빠가 멈춘 나이보다 두 살 더 많다. 병원에 누워 있던 아빠와 같이 킥킥거리며 그 시절 귀했던 바나나를 까먹던 기억이, 함께 한 마지막 모습으로 내게 기억돼 있다. 환하게 웃고 있던 아빠의 얼굴과 내 입에 한가득 담겨 있던 그 바나나의 맛을 한참 동안 기억하고 살았던 것 같다. 한 장의 수묵화로. 그리고 아빠와 차를 타고 숲 사이를 달리며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던 기억은, 색채로 담긴 아빠와의 시간이었다. 그날 들었던 음악이 ‘사계’라고 안 것은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때 들었던 음율을 흥얼흥얼거리며 기억하고 있었고, 나중에 그것이 그 유명한 비발디 음악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후, 남은 가족들과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는 살았지만, 아빠의 모습과 목소리는 점점 흐릿해져 갔고, 언젠가부터 내 머리 속 아빠는 그 존재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 깊숙이 박혀 있던 종이 박스 하나를 찾았고 그 안에서 굵은 일기장 한 권을 찾았다. 일기장은 3년간 매년 같은 날(日)이 한 쪽에 나란히 담긴 독특한 구조였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낯익은 글씨체와 아련히 안면이 있는 글씨체가 나란히 담겨 있었다. 나의 엄마, 그리고 아빠의 것이었다.






1982년 2월 19일 금요일 [일기 속 ‘나’를 ‘**’로 바꿔 담았다.]

대변을 하루종일 보지 않아 걱정. **은 무엇(아빠 마음)을 아는 것처럼 신나게 웃다.

=> 대변을 누지 못해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그 어린 아기가 알 리가 있으랴. 그래도 저리 웃고 있었는 걸 보니 막힘의 고통이 그리 크지는 않았나 보다. 그다음 날, 다행히도 나는 거사를 무사히 치른 듯했다. 아빠는 참 자세히도 나를 관찰한 듯했다. 내 머릿속 아빠의 존재는 이렇게 다시 숨을 쉬었다.





1983년 1월 29일 토요일 [일기 속 ‘나’를 ‘**’로 바꿔 담았다.]

웃기는 **! 밥상 들여가면 아빠보다 먼저 흥분한 목소리로, 희한한 웃음소리 내며 건넛방으로 달려 들어가서 밥 받아먹는 제 지정석에 서 있을 줄도 알고 엄마 할 일 하느라 우유 늦어지면 마루에 땅딸막한 두 다리로 앙 버티고 서서 슬리퍼랑 구둣솔이랑 닥치는 대로 부엌 바닥으로 내던지며 시위할 줄도 알게 되고⋯ (중략) ⋯ 참 많이도 컸다!

=> 그 시절부터 먹는 것에 대한 깊은 사랑과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듯하다. 거기다가 ‘욱’하는 성질까지 부리던 어린 시절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날의 일기를 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그래도 아빠, 엄마의 마음은 “참 많이도 컸다!” 싶어 대견하였나 보다.





1983년 3월 13일 일요일

한밤, 꼬마 이모랑 밤새는 줄 모르고 얘기하노라니, 깜깜 어둠 뚫고 “깡! 깡!” 하는 소리가 울려 오질 않겠는가. 꿈속에서 새O깡 꿈을 꾸는지 잠꼬대하는 모양이지?

=> 내가 여기저기 자주 펼쳐놓는 싱거운 우스갯소리들은 나의 엄마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다. 아기의 “깡” 소리에 그 글자가 들어간 과자 꿈을 꿨다고 생각하다니. 그날 내가 꾼 꿈이 사실은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과자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 중 Top3에 든다.





1984년 1월 3일 화요일 [일기 속 ‘나’를 ‘**’로 바꿔 담았다.]

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의 유혹에 못이겨 아빠랑 **는 강아지마냥 달려 나갔다. 카메라 맨 강아지들(?) 몇 컷, 눈을 동무삼아 찍어 줬더니 **가 활짝 웃으며 폼을 잡더이다.

=> 이 일기 속에 나오는 사진이 무엇인지, 읽자마자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사진에 찍히는 걸 즐긴 듯했다. 사진기만 들이대면 포즈를 취하고 얼굴을 갖다 댄단다. 여전했다. 계속 일기를 보다 보니, 지금의 내 모습들이 어릴 적부터 그대로 품고 올라온 것이구나 싶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 시절 부모님의 시선이 참 따스하게도 느껴졌다. 그 따스함은 평면으로 누워 있던 사진 속 인물들이 내 기억 밖으로 걸어 나와 숨 쉬게 했다. 생생히도 말이다.


















일기장 안에는 전부 ‘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디가 아팠는지, 무엇을 가장 잘 먹었는지, 어떤 행동을 자주 했는지,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는지,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참 소상히도 담겨 있었다. 하물며 ‘복남이’로 명명된 나의 강아지 인형까지 일기에 출몰해 있었다. 세 사람이 공유한 3년의 매일매일이 따뜻했고, 감사했다.

그 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읽어 내려간 일기장에는, 마흔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가진 관심사나 잘하는 것들이 이미 예견이라도 한 듯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꼭 씨앗을 보면 그 열매가 무엇인지 알듯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그날 부모님이 적어둔 글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의 일기장은 내 삶의 뿌리를 더욱 흙 속 깊이 내려주었기에, 내 소중한 꿈을 실현코자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힘이 실리는 듯했다.






언젠가 키보드 자판으로 열심히 두드려 소중히 보관하고 싶은 나의 역사책, 책등이 다 해진 나의 일기장. 그날 나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너무나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사실이 적힌, 귀하디 귀한 3년 치 영수증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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