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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May 06. 2016

정신적 왼손잡이 #19.내성

20160313. #19. 내성

독한 약일 수록 내성이 생기면 힘들어진다. 동일한 효과를 위해서, 더 많은 약을 먹어야 한다. 절대로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 더 먹어야만 한다. 술도 담배도 약도 그렇다. 자주 손댈수록, 필요한 양은 더 빠르게 증가한다. 

"지금 먹는 약은 내성도 거의 없어요. 적어도 전에 먹던 약보단 나아요."


확실히 갈증이나 뻐근함은 줄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상담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서 느끼는 비애감이 있다면, 

약을 평생 먹어야 하는 건 아닐까?



#1. 참아야 하느니라


소름이 자주 돋는다. 나의 무성의함, 나의 무신경함, 나의 무심함에 놀란다.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다. 

화를 내고 싶다. 면전에 대고 막 대들고 싶다. 아무에게나. 나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직급이 뭐 어땠든 관계가 어땠든. 내 맘에 조금이라도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바로 화를 내고 얕보고 깔보고 싶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이거 드실래요?

아, 전 배 불러서, 괜찮아요. (싫어요.)

-  이 기획안은 좀 고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이런 방향으로 손 봐서 다시 확인받겠습니다. (그냥 내가 하는 말은 다 싫죠?)

- 커피 마시러 갈까요?

전 오늘 아침에 커피 너무 많이 먹어서, 괜찮아요.(절 혼자 내버려 둬 주세요.)


괄호 속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말이다. 저게 문득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적이 있다. (맨 첫 번째 말은 실제로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 사과했다. 일에 몰두하던 중이라 그랬다고, 되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왜 나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 걸까? 왜 남을 밀어내고 싶은 걸까? 


분명, 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나? 



#2. 위험하다


가장 많이 흔들리고 있었던 여름엔, 심한 조울증이 의심되는 증상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기분이 오락가락한다기 보단 - 시종일관 삐딱한 상태다.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아침밥은 챙겨 먹었는지 안부를 묻던 작년 가을의 나는 없다. 일을 더 배우고 싶다고 질문하던 나도 없다. 주어진 오늘의 일을 하고 사라지는 나. 누군가가 먼저 인사하기 전까진 아예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나.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나. 하루 종일 모니터와 씨름하다가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듯이 등이 굽어있는 나. 

그런 나만 남아있다.

이게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느낀 시점은 회의 시간. 나 다음에 발언하는 사람에게 신경질이 났다. 그 사람이 내 말을 잘라먹은 것도 아니고, 회의 예절을 어긴 것도 아니다. 내 의견 다음에 발언하는 사람을 보면 '내 말이 맘에 안 들어서 바로 끼어드는 거야?'라는 생각이 울컥 올라온다. 회의 중에 몇 번이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와버릴까 봐. 공식적인 대화가 이 정도다. 일상적인 대화도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리 없다.  


비판적인 것과, 냉소적인 것과, 염세적인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누군가로부터 '넌 성격이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라는 평가를 듣는 데엔 이견이 없다. 의연한 사람,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꽤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외려 더욱 다치고 깨지는 일들을 부러 선택하고, 감정을 숨기는 일에 온 힘을 쏟아왔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논리도 근거도 없는 혐오는 느껴본 적이 없다. 이것이 몹시 싫다. 모든 일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유 없이 남에게 신경질을 퍼붓는(속으로지만) 내가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내게 농담을 던진 동료를 멀리 밀어냈다.


- ㅋㅋㅋㅋ위잉님 얼른 일해요ㅋㅋㅋ


네.



#3. 걱정도 중독된다


좌절과 냉소는 살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로부터, 경험으로부터 새겨지는 것들이다. 잘 될 거라고 희망을 갖고 만반의 준비를 가졌지만 번번이 나가떨어졌던 경험, 마음을 다 줬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한 경험, 최선과 최고의 결과를 내놓았지만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했던 경험. 거기서 내가 뭘 잘못했나 자책하고, 남을 원망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결과에 대고 절규하고 발악하며 처절한 시간을 겪는다. 그러므로 '해도 안 될 거다', '난 틀렸다'라는 말은 깊은 고통의 바닥으로부터 나오는 말이다. (즉 이런 말은 생각 없이 마구 내뱉어서도 안 될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함부로 '의지가 없다'고 비난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실수로라도 남을 상처 줄 것 같으면, 아예 입을 닫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악물었던 턱 어귀가 뻐근했다. 저녁 약을 일찍 먹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지금까지 삼켜온 냉소는 얼마만큼인지를 가만히 생각해봤다. 난 얼마나 우울에, 좌절에, 냉소에 중독되어 있을까.


치료를 받는 동안, 내 말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과 머리와 마음에게서 느꼈던 공포가 떠오른다. 꿈에서까지 시달렸던 최악의 기억들, 피비린내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던 상처, 눈을 뜨자마자 마셨던 소주, 물건을 사려다 말이 나오지 않아서 점원에게 휴대폰 메모장에 질문을 적어 건네었던 상황들까지. 


뭐하는 거야. 너 똑똑하잖아. 재주도 많고, 능력도 좋고.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난 잘났다고. 난 대학도 나왔고, 공부도 잘하고, 나이도 젊잖아. 왜 그러는 거야.


소리치며, 넘어진 나를 끌어당기던 자신감 충만한 '나'도, 지금은 함께 침대에 누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4. 냉소의 금단현상


"하나도 맘에 안 들어요. 사람이 많으면 어지럽고, 피하고 싶고. 화나고, 사람한테 소리치고 싶고. 내 앞사람이 느리게 걸어가면 밀어버리고 싶고, 왜 안 비키냐고,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어요."


"......"


"아, 사실 진짜 울고 싶어요. 화가 나는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는데, 막. 누가 내 앞에 서있으면, 날 막고 있으면 울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요. 울어버리고 싶어요."


물론 저런 행동을 실제로 한 적은 없다.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최대한 날렵하게 움직여 사람을 앞질러 가려고 한다. 그게 되지 않는 시내나 환승역에선 정말 울고 싶다. 급히 서둘러야 하는 길도 아닌데,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으면 싫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너무 버거운데 내 길을 자꾸만 보이지 않게 막으니까. 난 교통약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날 배려하지 않는다. 인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 그 속도에 맞춰 나도 걸어야만 하는 상황. 내가 서둘러야 하든, 그냥 좀 천천히 걷고 싶든, 아무것도 소용없다. 가만히 멈춰 설 수도 없다. 사람이 앞을 막으면 우뚝 멈춰 선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비참하게 사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내 맘대로 앞으로 걷는 것도 못하게 막는 거야?'


길에서는 흔한 상황이기에 사람이 지나쳐가면, 가득 찬 그 좌절감을 다시 사그러뜨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짧은 거리를 오가도 여독이 생긴다. 대형서점이나 장난감 가게, 문구점이나 디자인 샵을 좋아한다. 하지만 주말에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목적지 불문하고 가는 길에 이미 모든 정신이 타서 재가되어버리니까.


"한적한 카페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요?"


"내 모습을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위잉씨, 외모 관련해서도 스트레스 많았죠. 아마. 식이장애라던지."


"날 보면 분명 '왜 이렇게 됐냐'고 생각할 거니까..."


이런 걸 보고 속이 '꼬였다'고 하는가 보다. 나는 늘 상대의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하다 못해 넘겨짚어버린다. 그건 상대를 미워해서라기보단 나를 극도로 보호하려는 것에서 온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라고 생각했다. 난 의심이 많다. 그렇게 말해왔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다. 그렇게도 말해왔다. 그게 어느새 이만큼 왔다. 조금씩 더 예민한 상황들이 생길수록 더욱 나는 큰 각도로 비틀어졌다. 작은 일에도 휙. 더 큰 일에도 어김없이 휙, 그리고 그걸 더 견디지 못하면 '뚝'하고 더욱더 비틀리고......


앞으로 생활에선 말수를 줄이는 게 좋겠다.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쌓여서 돌이 된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말을 뱉는 일보다는 삼키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 다시 작년 7월, 나의 모든 표현 수단이 끊겼던 그때의 공포가 스르르 내 목덜미를 한번 닦고 지나갔다. 


하지만 별 다른 방법은 모르겠으니까.......



#5. 아니요.


위잉씨, 오늘 우리 팀, 일 마치고 술 먹을까요?


- 아뇨, 전 괜찮습니다.


(난 당신과 어울리는 게 너무 어려워요. 당신은 한없이 밝고 쾌활해요. 근데 난 슬픈 말 밖엔 할 줄 몰라요. 하니까 즐거운 자리엔 내가 없는 게 나아요. 언제나 손 내밀어주는 건 고맙지만, 난 그걸 잡는 방법을 몰라요. 모르겠어. 그러다 보면 결국 별로 잡고 싶지도 않게 됩니다...... 아아, 너무 괴로워요. 혼자 가만히 쉬고 싶어요.)


1년 넘게 먹던 약이 끊겼을 때의 괴로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10여 년 넘게 먹던 냉소를 그만두는 일은- 더 말할 이유도 없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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