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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찬 Mar 06. 2024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자

건강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들 

퇴근길에는 라디오를 듣는다. 3개 정도의 채널을 번갈아 가며 듣는데, 채널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수 많은 욕망이 부딪치는 지옥같은 현실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도 하고 아무 걱정 없는 한량같은 세계를 만나기도 한다. 채널에 따라 바뀌는 내 생각과 감정을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한 사람을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 채널에서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독서량이 일 년에 9-10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문고판 책에 교통카드를 넣어 무료로 배포한 브라질의 출판사와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요금을 받지 않는 루마니아의 한 도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소개하면서, 진행자는 책을 통해 전해지는 인생의 의미를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빗방울 소리와 묘하게 어울리는 음악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들은 넘쳐나는데 왜 세계 각국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을 걱정할까? 정보의 바다를 채운 이야기들이 가치가 없어서?’    

 

‘책을 통해 전해지는 인생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을 통해 전해지면 또 다를까?’     


‘임신 중에 종이책을 많이 본 엄마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성향이 다를까? 인공지능이 대신 기억하고 생각해 줄지도 모르는 시대에 종이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속에서 인류는 또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닐까?’    

 


저녁을 먹고 ‘마라톤에서 지는 법’이란 책을 읽는다. 라디오 방송이 다시 떠오르면서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넘길 때의 손의 감각과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종이의 냄새, 책을 읽는 동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잠시 주변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 같은 고립감까지.  

    

종이책이라도 수험서와 같은 목적이 뚜렷한 책이나 불량식품 같은 책이 주는 느낌은 이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기존의 나를 깨뜨리는 세계로 끌어들이고야 마는 좋은 책들이 있다. 그런 책은 모니터를 통해 접하는 정보들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자극을 몸과 마음에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또한 어쩌면 라떼는 말이야 같은 구세대인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환자를 살피면서 몸과 감정의 감각들이 마모된 경우를 자주 본다. 일상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삶이 그 밥에 그 나물인 경우가 참 많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일상의 단조로움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 보다 큰 문제는 우리가 착각을 하면서 산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SNS나 유튜브 등을 통해 뭔가 새롭고 다양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것이 우리 내면에 일으키는 파문은 지극히 말초적이고 돌아서면 잊히는 별것 아닌 게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정보의 호흡 또한 점점 짧아지고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마치 색깔만 다른 막대사탕을 먹는 것처럼 포장과 향은 다양하지만 먹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설탕 맛 뿐인 것과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이 세상에 빠져 있다 보면 매사 감흥이 없고 무감각해진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타인이나 다른 존재에게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나를 둘러 싼 세상과의 관계가 점점 옅어지고 무의미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무너진 관계 속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      


여기에 더해 현대인들은 이전의 사람들보다 몸을 적게 쓴다. 그러다 보니 순수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얻는 감각의 양이나 종류 그리고 즐거움이 현저하게 줄었다. 의식적으로 운동을 하고 아웃도어라이프를 찾아 떠나기도 하지만 몸보다는 머리와 감정의 노동이 많아졌다. 먹는 음식에서도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보다는, 양념이 만들어낸 인공의 맛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런 몸이 세상과 만나는 일이 줄어 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가상현실’이란 단어라고 생각한다. ‘가상현실’ 이라니... 왜 눈 앞에 펼쳐진 진짜 세계를 버리고 가짜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인가!      


반면에 스마트폰과 컴퓨터로부터 받는 자극은 현저하게 늘었다. 우리는 단순히 화면의 글자나 그림 혹은 영상만을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이 들어와 뇌를 흥분시킨다. 거북목과 같은 신체적 증상 뿐만 아니라 신경계의 과부하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양적인 과부하 뿐만 아니라 정보의 질도 문제다. 다양한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이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그것을 접하는 사람 또한 그만그만한 수준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얄팍한 정보들이 일으키는 말초적인 자극들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이유도 모른 채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이 된다.       



진료를 하면서 이 예민함과 피로의 상태는 둔감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동일한 자극의 반복은 더 이상 흥분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둔감함은 어쩌면 너무 과도한 자극으로부터 살아 남기 위한 뇌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이 상태에 빠진 환자들에게서는 생기가 없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매사에 시큰둥하거나 때론 사소한 것에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상태를 그냥 정상이라고 여기며 산다. 그 중 일부는 약물이나 엽기적인 행각을 통해 더 강한 자극을 탐닉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은 아마 날이 갈수록 심해질 확률이 높다. 현대인이 컴퓨터와 스마트폰 그리고 인터넷을 포기하는 것은 더 나은 도구가 생기거나 전지구적 재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이 글을 쓰는 것도, 진료기록을 정리하는 것 모두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넘치는 이런 자극들은 뭔가 결핍이 느껴진다. 집밥과 식당밥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맛있어 보이지만 계속 먹으면 맛도 없고 건강도 나빠지는 것도 비슷하다. 건강을 위해서는 집밥과 같은 자극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극을 과거에 인간종이 해왔던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산업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했던 일들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책을 읽는 것은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삶을 속도를 조정하는 의미가 있다. 세계 각국에서 책읽기 운동을 펼치는 것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에서 얻는 순수한 즐거움, 가공되지 않은 식재료에서 느끼는 맛과 향, 흙을 밟고 자연을 접하는 감촉, 인위의 소리가 아닌 자연의 소리나 고요함 같은 것들이 그런 집밥과 같은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예민해지고 지친 현대인의 마음과 몸에는 이러한 자극들이 가장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사람들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은 자극에 아주 정직한 반응을 보이며 산다. 환자를 치료하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현대사회에 넘치고 있는 휘발성 자극들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다. 없앨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가능한 줄이고, 유해한 자극 때문에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옛날 어느 휴대전화 광고처럼 잠시 그 자극들을 끄고,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우는 건강한 자극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자.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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