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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Nov 08. 2022

글쓰기의 이유; 유리의 마음

요즘 글쓰기의 에너지가 예전 같지 않다. 괜스레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마련했던 다이어리를 다시 찾아보았다. 


https://brunch.co.kr/@windfromlotus/1


올해는 날짜나 달력이 없는 그냥 수첩을 쓰다 보니 1권은 다 쓰고 2권 째를 쓰고 있다. 게으름에서 멀어지고자 했지만 말과 다르게 행동은 게을러질 때가 많았고, 게을러짐의 이유로 쉼의 필요를 갖다 대는 뻔뻔함은 늘어갔다. 


 2022년 1월 3일의 첫 번째 기록을 찾아본다. 



사진으로 찍어 보니 더 못난 글씨이다. 정말 나아지지 않았다. 기록 따위는 그만두라고 말하는 첫날의 내 안의 나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것 같다.



1월 28일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지금은 100여 편의 글이 쌓였다. 여름까지 썼던 글들을 엮어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는 독립 출판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즈음의 나는 너무 쓰고 싶어서 잠을 잊고 글을 쏟아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에너지로 모니터 앞에 앉은 내가 있다. 


첫날 다이어리에 썼던 문장들은 지금의 나를 예언한 것이었을까?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는 진짜 내가 아닌 꾸며진 나인 것 같기도 하다. 어미를 "~합니다"로 하여 쓴 글은 현실의 나 보다 한껏 다정한 듯하다. 현실의 나를 '문장'이라는 깔때기로 걸러내어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글 속의 나는 나와는 다른 나가 되어 있다. 내가 쓴 나의 이야기임에도 글과 '나'가 단절된다. 


pinterest.com

학교 다닐 때 커다란 비누를 가지고 조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연필로 기본 모양을 따고 조각칼로 조금씩 다듬다 보면 어느새 너무 작아져서 만드려고 했던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비누로 재사용을 할 수도 없게 된다. 


글 속의 '나'가 가끔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에 생각한 어떤 생각을 전하려고 필요 없는 부분을 조금씩 다듬다 보면 어느새 처음 생각이 너무 작아져 버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내 예상과는 다른 어떤 우연으로 꽤 그럴싸 해 보이는 문장이 그냥 툭 튀어나올 때도 있다.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완전하게 차단되기 싫은 마음, 그것이 유리를 존재하게 한 것이다. 

                                                                                         -김소연의 [마음 사전] 21쪽

 

1월 5일에 썼던 다이어리의 문장이다. 이 답답하고 가끔은 번거로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유리'의 마음인 것 같다. 


차단되고 싶으면서도 완전하게 차단되기 싫은 마음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기억되고 싶지 않지만 완전히 잊히기도 싫은 마음


그 적당한 거리감이 나의 글쓰기의 이유인 것 같다. 타자와 나, 글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 만드는 균형의 감각이 좋아서 글을 쓰게 된다. 나 1, 나 2, 나 3,... 나 n과 글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많은 나들이 다른 나를 완전히 잊지 않고 알아주기를, 완전히 차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글쓰기의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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