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마음과 남겨져야 하는 마음

by 연꽃 바람

마음에도 색깔, 향기, 질감, 맛, 온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은 빛이 나서 낯설지만 지켜보게 되고, 어떤 마음은 닿기만 해도 까끌거립니다. 어떤 마음은 분명 달콤했고, 어떤 마음은 다시 떠올리기 힘들 만큼 쓰기도 했습니다. 어떤 마음은 소주처럼 첫 맛은 쓰지만 끝 맛이 달콤해서 두 번째 만남을 부르기도 합니다. 갓 지은 쌀밥의 달큼하고 구수한 향기가 나는 마음도 있고, 가을 새벽 공기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마음도 있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그 일들을 도장깨기 하듯이 몰아쳐서 해치우는 쾌감을 좋아합니다. 특히 동선이 딱딱 맞아서 시간을 단축했을 때 뭔가 진짜 유능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주민센터에 갔는데 내 앞에서 차가 한 대 나가서 바로 그 자리에 주차를 했습니다. 미리 검색해 둔 덕분에 서류 작성도 휘리릭 마치고 처음 하는 일이지만 익숙한 듯 처리하고 다시 차로 돌아온 시간은 대략 15분 남짓! 내친 김에 미뤄두었던 아이의 책상을 사러 가구점에 가보려고 검색을 해봅니다. 마침 이동 시간까지 생각하니 딱 가게 문 여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어른 중의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가구점에 도착하니 막 문을 여는 시간이라 그런지 주차장이 한산합니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직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윙윙 청소기 소리만 들립니다. 나를 발견한 직원은 급하게 마스크를 찾아 쓰고 응대를 시작합니다.


직원은 특유의 ‘~하십니다’라는 극존칭의 베일 뒤로 뭔가 절대 따뜻한 마음만은 내어 주지 않겠다는, 자신은 절대적으로 지금 비즈니스 중인 상태임을 온 몸으로 보여줍니다. 오직 정보만을 제공하겠다는 건조한 말투가 정보 제공만이 자신의 일이므로 그 이상은 친절은 요구하지 말라는 선긋기로 느껴집니다. 개인적인 의견이나 조언은 구하지 말 것이며, 선택은 오직 ‘고객’님의 몫이며, 사실 자신이 제공하는 정보 안에서는 선택지가 그리 넓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고르라는 식이었습니다. 선택의 시간이 끝나고 직원이 주문서 작성을 위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때 김이 오르는 전기 포트가 보였습니다. 나의 완벽한 도장깨기와 같은 순탄한 흐름이 그 직원에게는 하루의 루틴을 깨는 소용돌이였던 것 같습니다. 매장 청소기를 돌리고 차 한잔 하며 하루의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었는데 문 여는 시간이 되자마자 정말 문을 열어버린 첫 번째 고객이 참 싫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처음엔 차갑고 까끌거렸던 그 마음이 달리 보였습니다. 까칠한 바늘에 둘러싸인 성게 같은 마음 속에 청량한 바다 향을 품은 속살이 느껴졌습니다.


마음도 돈을 주고받듯이 채무, 채납, 변제처럼 산술적이라면 딱 떨어지고 명쾌할 텐데 ‘그냥’이 마음인지라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조차도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에도 어떤 마음은 누군가로부터 받아서 더 커진 것도 있을 겁니다. 또 어떤 마음은 누군가의 날카로운 마음에 깎이고 깎여 작아지고 쫄아든 것도 있겠지요. 어떤 마음은 내 마음에 착 붙어 화학작용을 일으켜 고유의 질감과 맛, 온도, 색깔, 그리고 향기가 된 것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의 마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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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른 이들에게 준 마음들 중에도 그렇게 다른 이의 마음에 착 붙어 있는 것도 있겠지요. 제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깎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에서는 향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존재가 완전히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 마음들은 다른 이의 마음에 뒤섞여 이 세계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DNA라는 유전정보가 번식과 진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개개인의 존재와 별개로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마음의 조각들도 별개의 생명을 유지하며 이 세계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세계에 남겨져야만 하는 마음들이 멀리, 그리고 깊숙이 다른 마음들에 파고들어 오래오래 생존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마음이 그 마음들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좋은 마음들을 찾고 만나고 간직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싶습니다.


남겨야 할 마음이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겨지지 않을 마음들은 부디 우리 세대에서 종말을 맞을 수 있기를, 우리의 무덤에 고요히 묻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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