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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너란 말이냐!

by 연꽃 바람

드디어 택배가 왔습니다. 습기에 취약한 종이 인쇄물이 비가 오는 월요일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같은 택배사에서 어제와 며칠 전에도 택배가 도착했었는데 책이 도착한 줄 알고 설레며 뜯었다 실망하기를 반복했었습니다. 그런데 "습기에 취약한 종이 인쇄물"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런데 상자 크기나 너무 작아서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제작한 책의 크기가 122*190*70mm임을 생각하면 10권을 쌓아도 높이가 7cm이니 상자 크기가 작은 것은 당연한데 말입니다. 처음 만든 독립출판물이라는 의미가 제게는 커서인지 큰 의미에 비해 상자가 너무 작더군요!


책의 표지에 적힌 제 이름이 참 낯설었습니다. 제목 상자를 왼쪽으로 옮겼다가 오른쪽으로 옮겼다가 위로 아래로, 폰트를 이거에서 저걸로, 크기를 1포인트 크게 했다가 작게 했다가,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옮길 수 없는 상태로 인쇄된 글자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책을 잡고 휘리릭 책장을 넘기니 순식간입니다. 내가 쓴 글로 이 얇디얇은 '책'이라는 물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지나친 시간과 노력이 '책'의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카페인을 들이붓고 어깨가 아려가며 클릭을 했던 노동의 흔적은 싹 감춰진 말갛고 천연덕스러운 새 책이 내 손에 잡혀있습니다. 익숙하고도 낯선 조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잡고 나니 그냥 '책'으로 보입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이 책을 처음 만났다면 이 책을 열고 읽었을까요? 지갑을 열어 이 책을 샀을까요? 그런 질문들 앞에 대답을 내놓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대에 놓인 많은 책들, 도서관에 꽂힌 많은 책들의 제목을 훑고 내용을 뒤적이다가 '내 취향 아니야', '편집이 너무 별로야'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1초 만에 내 손에서 배제되었던 많은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생각은 그 사람이 들인 노동의 시간과 비례하여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이제야 읽게 되었는지 모를 정말 좋은 책들도 '가지고 싶다'라는 욕구로 이어지기는 매우 힘든 때입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별생각 없이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지만 한 권의 책은 개개인의 엄격한 취향이라는 검열을 거쳐야 겨우 누군가의 책장에 꽂힐 수 있습니다. 그런 시장에 제가 저 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내놓는다면 무엇으로 취향이라는 검열을 넘을 수 있을지, 대체 얼마의 가격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보니 수정되지 않은 따옴표도 보이고, 폰트 설정이 엉뚱하게 된 부분도 보입니다. 완벽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게 엉성함이 눈에 띕니다. 생각보다 더 가독력이 좋지 않고, 생각보다 더 특징이 없습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 제가 혼자서 너무 크고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마법처럼 인쇄소를 거치면 더 그럴싸하고 멋진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독립출판물은 생각보다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편집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제작도 몇 번의 클릭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독자의 손에 닿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첫 번째 독자인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듭니다. 내가 쓴 이 책을 내가 납득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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