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7주. 산전우울증?
최근 해결하기 어려운 우울감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매일은 아니고, 이따금씩 (3-4일에 한번씩) 찾아왔다가 사라지는데 그 강도가 강하다.
난 임신 전 우울증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 후에도 우울증은 아니더라도 가끔 우울감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요즘 내가 경험하는 우울감은 양상이 다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과 4년 전, 우울증을 겪었을 때는 심한 우울감이 2주 이상 지속되고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때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세상이 흑백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런 의욕도 재미도 활력도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우울감은 금방 왔다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때와는 다르다. 임신 전 평상시 가끔 느끼는 기분이 다운된 정도보다는 훨씬 강도가 세지만, 금방 사라진다는 점에서 우울증과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상담 전문가도 아니다. 우울이 의심된다면, 특히 강도가 높은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지속 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길 꼭 추천한다. 어디서부터 예약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정기적으로 만나는 산부인과 의사나 조산사에게 심리 문제를 털어 놓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일을 시작하는 게 어렵진 않으나, 일단 일을 시작하고 나면 유지하기가 어렵다. 점심을 먹으면 퍼지고 다시 일로 회복되기가 어렵다. 오후 1-3시에 집중하기 어렵고 갑자기 나란 인간이 매우 하찮게 느껴지며 우울과 자기 연민에 빠진다. 이때만 딱 나를 본다면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다. 그런데 4-5시가 지나면 아무렇지 않은 상태로 회복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엄청난 감정의 진폭은 내가 겪은 입덧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나는 입덧이 없다가 갑자기 어떤 시간대에 (보통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메슥거리고 토할 것 같더니 또 갑자기 아무렇지 않아 진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이러한 emotional challenge는 임신 때문일까.
모른다. 하지만 가능한 이유는 넘쳐난다.
1) 호르몬. 말해뭐해. 임신 중 날뛰는 호르몬은 내 심신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2) 임신 후 변화에 적응하느라 받는 스트레스. 입던 옷은 안 맞고, 입부복 입으면 허수아비에 포대자루 덮어놓은 것 같고, 계속 길게 내려오는 옷을 찾는 날 보면서 거울을 보면 침울하다.
3)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 내 커리어가 쳐지는 게 두렵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은 잘 나갈 것 같아 초조하다.
4) 부모가 된다는 것에서 오는 부담감. 솔직히 나 한 사람 챙기기도 버겁단 생각이 드는데 애기를 케어해야 하는 부모가 된다는 게 두렵기도 하고, 내 젊은 날은 이제 끝났나 싶어 서럽다. 내가 선택한 건데 말이다.
아 정말 그러게 말이다.
1) 받아들이기
이 상황을, 이 변화를, 이 두려움과 어려움을 accept 해야 한다.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에 Stress management 수업에서 자신이 수용하는 내용을 문장으로 써보는 활동을 했었다. 예를 들면,
"I accept that I am a pregnant woman. I accept that I have emotional challenges related to my body shape, my career, and becoming a mom."
나도 평온하고 심플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어쩌겠는가. 내 안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걸. 그리고 엄마가 된다는 건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만한 일인걸. 그게 당연한걸.
2)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보기
우울이 덮칠 땐 시야가 좁아진다. 좁아진 시야는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심지어 부정적인 면을 실제보다 크게 인식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가장 간단한 건 상황에서 감사할 무언가를 찾는 연습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
- 입덧이 심하지 않다.
- 지금까지 임신 중 큰 이벤트 없이 아이가 잘 자라주고 있다.
- 비교적 특별한 질병력이나 위험 요인을 갖고 있지 않은 저위험 산모다.
- 남편은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사람이고 우리는 좋은 팀이 될 것이다.
-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다.
- 당장 육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카페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행복하게 지내야지!
나는 "산전우울증" "임신우울증"을 키워드로 폭풍 검색을 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를 얻었다. 이 글을 보고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혹은 그런 누군가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누군가가 공감과 도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다가가 주고 싶고, 물어봐 주고 싶고, 말해주고 싶다.
마음이 힘들진 않아?
만약 그렇다면 혼자가 아니야. 나도 그래.
괜찮아.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으면서 아무렇지 않은게 더 이상해.
잘하고 있어.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
너 짱! 너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