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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2] 진로고민 - OO아, 교수가 하고 싶어?

포닥의 진로고민. 학계 트라우마.

by 행인A

난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시켜줄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 문장이 과거형인 이유는, 구직 과정에서 open mind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고, 최근 어쩌면 교수를 하며 내가 행복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나는 "교수"라는 직업을 무조건적으로 싫어했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도 매우 경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가 교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볼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그런 사람"이란 내가 교수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낸다. 이 부정적인 이미지엔, 아는 척하며 얘기하고, 구조적으로 제왕적 지위를 누리며 어리고 열정과 체력 만땅이나 아직 불합리에 맞서는 방법을 잘 모르는 학생들을 착취하고, 사회생활이 부족해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상이 있다. 익명을 빌려 좀 더 솔직히 얘기해보면, 그동안 내 주변에 좋은 교수들도 많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훌륭한 실력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교수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소수에게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99개 선플을 보고 1개 악플을 보면 악플만 뇌리에 남 듯, 부정적인 교수의 이미지가 내 머리에 박혀있다. 이런 부정적 인식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내 삶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어 왔는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이도 박사과정과 포닥 과정을 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 (재수없지만 익명이니 말해본다). 박사과정을 진학할 땐 연구가 너무 좋았고 그래서 더 알아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또, 꼭 교수가 아니더라도 이 분야에서 전문가로 일하려면 박사학위가 언젠간 필요할 것 같았다. 마침 외국 대학에서 오퍼를 받았다. 포닥을 시작할 땐 이 분야 탑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어떨지 궁금했다. 마침 일하고 싶던 연구기관에서 오퍼를 받았다.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기보단 좀 더 그들과 일해보고 싶었다. 종합해보면 호기심 + 열정 + 실현가능함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놀랍도록 순수하고 순진했다.


사실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일, - 즉, 연구, 멘토링, 티칭, 계속적인 배움 - 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진 직업이다. 그런데도 나는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난 내가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인간은, 아니, 나는 나약하다. 시스템과 문화에 반항하기보다 적응하며 산다고 생각했다. 교수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공포에서 온 자기 방어라 제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 (주변에 교수들을 생각해봐, 안 "그런 사람"도 얼마나 많아?)를 생각해도 설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잔뜩 움츠려있었고 벽을 쌓아가고 있었다. 어릴적 부모에게 학대를 받으면 자신도 똑같은 부모가 될까봐 아이 낳길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공감 되었다. 나도 같은 이유로 대학교 교수가 되기 두려웠다.


최근 '어쩌면 교수를 하면서 내가 행복할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연구에 자신감이 붙었다. 앞으로도 연구 실력을 계속 쌓으면, 시스템과 문화를 쌩까고도,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내 생각이 비웃음을 사지 않고도, 학계에서 적응하며 활발히 연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둘째, 나에게 트라우마를 준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모에게 학대 당했던 사람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듯, 나도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그것도 나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을, 알량한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대우하고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경계하고 노력하다 보면 그래도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셋째, 최근 같이 일하고 있는 교수가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내가 갖고 있었던 교수에 대한 단단한 편견을 부숴버릴만큼. 좋은 어른을 만나게 되어 정말로 감사하다.


지금하는 이 생각들이 맞을까, 아닐까.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해서 생각을 하자.

언젠가 "OO아, 교수가 하고 싶어? 시즌2"를 제목으로 글을 쓸 날이 있겠지.

그때는 좀 더 생각이 정리되면 좋겠다.




위의 글은 내가 약 2년 전에 쓴 글이다.

순진했고 오만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하고 싶다고 진로를 결정할 수 있지 않다.

불과 2년 차이이지만, 엄마가 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교수가 되고 싶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연구하며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여전히 연구는 좋고 짜증나지만 그게 나다.

직업이나 직장 같은 타이틀 아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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