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용유담을 지나면서부터는 안타깝게도 아스팔트길을 한참 걸어가야 한다. 햇볕을 피할 수 없는 이러한 길이 거의 60%를 차지하는 4코스. 따라서 계절과 날씨를 잘 고려해서 가기를 추천한다. 가급적 여름보다는 봄이나 가을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 하나마나 한 말이다. 대부분의 걷기가 여름보다는 봄이나 가을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래도 여름에 걸을만한 길도 있기는 하다. 숲으로 우거진 구간이 많은 길은 여름이라도 수월한 편이다. 앞서 걸었던 3코스가 그렇다.
아스팔트길이라 발은 아프지만 곳곳에 예쁜 꽃도 있고 작은 물줄기도 떨어진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슬슬 걸을 만하다. 그리고 차량이 거의 지나지 않는 길이라 편하게 걸을 수 있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다리가 아플 때쯤 쉼터(간이매점)가 있다. 항상 여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계절의 주말에는 여는 것 같다. 잠시 들러서 막걸리에 컵라면이라도 한 사발하면서 다리도 쉬면 좋다.
그리고 둘레길을 걸으면 여러 밭작물들을 구경하면서 걷게 되는데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로서는 대부분이 풀떼기로 보여서 안타깝다. 지금 길가에 말리는 저것은 깻단일까? 지금이 깨를 추수하는 철인가?
어디서나 걷기를 하다 보면 내가 워낙 느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 단체로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결같이 걸음들이 빠르다. 길을 걷는 사람들만 빠른 것이 아니다.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빠르게 지나간다. 4코스의 대부분은 임천강을 끼고 걷게 되는데 계절이 맞으면 래프팅 하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다. 래프팅 보트 몇 대가 지나갔다. 재밌겠다.
지리산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이라서 곳곳에 다양한 마을들을 지나게 된다. 이 구간에는 마을 안내문들이 잘 되어 있다. 아까 본 용유담 전설 탐방로가 모전마을과 세동마을을 거쳐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 구간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지리산둘레길 구간에 대한 안내문들이 중간중간 설치되어 있다. 현재 위치도 확인하고 인근 마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서 요긴하다. 다만 최근 보니까 시간이 지나 낡아서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도 더러 있다. 나무로 만든 것들이다 보니 관리가 더 어려울 것 같다.
강을 끼고 이어진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산 쪽으로 들어선다. 그래도 길은 작은 농로로 잘 닦여져 있다. 한적한 농로를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 커다란 바위가 위태하게 자리하고 있다. 바위가 원래 자리하고 있었을 텐데 길을 참 얄궂게도 내었다. 괜히 바위에게 미안해진다.
둘레길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쉼터, 정자 등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둘레꾼을 위한 시설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것도 있다. 어느 것이나 깨끗하게 이용하고 쓰레기를 절대 버리지 말자. 이 쉼터 옆에는 우편함들이 몇 개 매달려 있다. 바로 옆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인 우편함일까? 예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깊은 산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우편물을 배달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우편함을 설치하면 수시로 사람들이 와서 찾아간다고 했다. 아마도 그런 용도의 우편함이 아닐까 싶다.
쉼터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집이 몇 채뿐인 작은 마을 옆을 지난다. 여기가 운서마을인가 보다. 그런데 전봇대가 삐딱하게 서 있다. 아까는 커다란 바위가 길가에 쏟아질 듯 서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봇대가 위태롭게 서 있다. 뭔가 이 길에는 마음 쓰이는 것들이 눈에 띈다. 마을을 지나면 논과 밭이 이어지고 길은 산속으로 향해 있다.
산속으로 난 길을 따라 구시락재를 향한다. 많이 힘들까 걱정하면서 올랐지만 '이럴 수가!' 허무하게 끝났다. 평탄한 길을 따라 아주 조금씩 올라간다는 느낌이 이어지다가 산고개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시멘트길로 살짝 오르막이 끝이다. 4코스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쉬움, 허무함이라고나 할까?
운서마을에서 구시락재까지 이르는 길은 조선말 유학자인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에 오르고 쓴 '유두류록'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그것도 600년 전에 지리산에 오른 산행기가 존재한다니 신기하다. 오늘 걸은 이 길이 600년 전에 한 유학자가 걸었던 길이라고 하니 뭔가 근사하다.
구시락재를 넘어서니 계속해서 내리막이다. 야금야금 올라온 길이 제법 높았나 보다. 이래서 가랑비에 옷 젖는 다고 하는가 보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아까 헤어진 임천강을 다시 만난다. 멀리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면서 내려가니 힘든 줄을 모르겠다. 물론 내리막길은 무릎을 조심해야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걸을만하다.
내려오다 보면 이제 막 집터를 닦고 있는 곳도 지나고 오래된 집도 지나면 동강마을이 나온다. 화장실이 있는 곳이 금계-동강 구간의 종점이다. 이 화장실 옆으로 넓은 공터가 있는데 차를 세워둘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구간(5코스)으로 이어지고 좌회전하면 동강마을이 나온다. 동강마을에서 다리를 건너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구간의 좋은 점은 동강마을에서 버스 타고 금계나 인월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에는 차를 인월센터에 세워두고 3코스에 이어 4코스를 걸었기 때문에 차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참 다행이었다. 지리산둘레길 전체를 통틀어서 여기만큼 대중교통이 바로 연결되는 곳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구간의 대부분은 인근의 큰 읍이나 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다시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어쨌든 힘든 구간이 없어서 그저 한없이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어서 좋았던 금계-동강 구간! 특히 해가 나지 않아서 걷기 더 좋았다. 그야말로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