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2014년 8월에 지리산둘레길 인월-금계, 금계-동강 구간을 걷고 나서 집에서도 내내 지리산둘레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 구간은 어떤 길이 펼쳐질까? 이번에는 고도를 많이 높이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어떤 마을을 지나게 될까? 지리산둘레길을 터벅터벅 하염없이 걷고 싶다.'
마음으로는 몇 번이고 지리산을 향했지만 워낙 먼 거리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뭣이 그리 바쁜지 주말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2달이 지난 10월에야 겨우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이번 걸을 길은 지리산 둘레길 동강-수철 구간(5코스)으로 12킬로이다. 보통은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내 걸음으로는 7시간 정도 걸렸다. 난이도는 '중'이라고 하는데 체감으로도 앞서 구간들보다 좀 더 힘이 들어서 '중'이 맞는 것 같다. 크게 산을 하나 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든 만큼 좋은 경치를 보고, 좋은 소리를 듣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서 오감이 즐거운 길이었다. 이번 여행기도 지난번에 이어서 2014년 10월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는데 일부 내용은 최근 정보로 업데이트하였다.
걷기 전에 유용한 정보를 살펴보면
- 대중교통편은 지금까지와 달리 이용이 어렵다. 나는 동강마을 출발점에 차를 세워두고 걷고 나서 수철마을에 도착하여 1박 하고 다음날 택시를 타고 동강마을로 갔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수철마을에서 함양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함양에서 동강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버스시간을 잘 확인하고 가야 한다. 택시는 수철마을의 착한 택시 기사님 번호가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다. 전화드리면 정류장 건너편 집에서 바로 나오신다. 택시비는 수철에서 동강까지 1만 5천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미터로 계산해도 비슷하게 나온다. 이 마음 좋은 택시 기사님은 요 다음 코스와 그 다음 코스까지 와 주셔서 아주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3코스, 4코스와 달리 5코스 이후는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구간이 많다. 물론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버스시간 맞춰서 다닐 수도 있다. 그건 각자 스타일대로 이용하기로 하자.
- 매점 혹은 주점이 두어 군데 있었으나 계절에 따라 열지 않는 곳도 있다. 그리고 산속 구간이 제법 기니까 먹거리를 잘 챙기길 권한다.
- 숙소는 지난번에도 소개했듯이 동강마을에는 민박집이 있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 수철마을에는 민박집이 몇 군데 있지만 아주 많지는 않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대비책을 세워두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갔을 때 저녁 무렵에 도착했는데 민박집이 다 차서 묵을 곳이 없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걱정하니까 식당 사장님이 동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에 자녀들이 쓰던 빈 방이 있다고 소개해주셔서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시골 인심을 느낄 수 있어서 전화위복이었다.
지리산둘레길 5코스는 황금 들녘을 볼 수 있는 가을에 가기를 추천한다. 정말 아름다운 들판을 볼 수 있다. 지난번에 걸었을 때는 푸릇푸릇하던 벼들이 이제 황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10월 초에 걸었는데 10월 중순이었다면 완전한 황금들판이었을 것 같다. 자연을 통해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예쁜 색으로 느낄 수 있다. 한참 동안 이렇게 들판을 끼고 아스팔트길을 걷게 된다. 아스팔트길은 싫지만 들판은 좋다.
아름다운 꽃들을 지나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을 만나게 된다. 산청 함양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국군이 공비토벌작전을 하면서 7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다시는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모하는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좋은 일에 대한 기념 공간도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비극적인 일에 대한 추모, 기억의 공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은 자주 까먹고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좀 힘들지만 참배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추모공원을 지나면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다소 한적한 산 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길을 안내해 주는 나무로 만든 조형물을 보게 된다.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에는 이것을 벅수라고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승 모양을 본뜬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얘가 참 마음에 든다. 여러 둘레길들이 다양한 상징물로 길안내를 하는데 나는 이 장승 모양이 주변 경치와 잘 어우러져 가장 보기가 좋았다. 다만 나무로 되어 있다 보니 관리가 어려운 것이 흠이다. 마을이나 길의 특징을 설명해 주는 안내문도 그렇고 이 벅수도 그렇고 나무로 만든 것은 자연에 잘 어울리지만 대신 다정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잠시 후에 본격적인 산길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시냇물을 끼고 올라가게 된다. 산 속이라 그늘도 지고 물소리도 시원한 것이 한여름에 오면 가장 좋을 듯하다. 걷는 내내 시냇물 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하지만 좋은 점이 있으면 힘든 점도 있는 법이다. 산길이라 계속 오르막이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오르막이 한참 이어지니까 다리가 아프다. 이럴 때는 개울가에 앉아서 쉬어가자. 준비해 온 오이를 한입 베어 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슬픈 전설을 가진 상사 폭포를 만난다. 어여쁜 여인을 사모한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죽어서 뱀으로 환생하여 여인에게 갔으나 여인이 깜짝 놀라 던져버린 장소에 폭포가 생겼다는 줄거리의 이야기였는데 그게 많이 와전되어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불쌍한 총각을 두 번 죽인 잔인한 전설이다. 상사 폭포는 둘레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아래로 조금 내려가야 한다. 규모가 작지만 나름 예쁜 경치니까 가볼 만하다. 많이 힘들지는 않으니까 살짝 내려가보자.
상사폭포를 지나고서도 한참 동안 시냇물인 듯한 계곡을 끼고 올라가게 된다. '시냇물인 듯한 계곡'이라고 한 이유는 규모가 아기자기하고 착해서이다. 우렁찬 물줄기를 자랑하는 큰 계곡이 아니라 물줄기가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이다. 하지만 오르막이 제법 있어서 작은 소를 이루는 곳도 있어서 계곡이 맞다.
계곡이 왼쪽에 있어서 물소리가 계속 왼편에서 들렸는데 작은 개울물을 건너 이번에는 오른쪽에 계곡을 두고 걷는다. 그러자 신기하게 오른편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린다. 너무 당연한 현상이지만 다른 산행에서는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신기하다. 아주 재밌는 경험이다.
오르막 산행에 슬슬 지칠 때쯤 뜻밖에도 주막을 만난다. 이 깊은 산속에 어인 주막일까? 여기는 '쌍재'라고 하는데 함양에서 산청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옛길이고 이 고갯마루에는 마을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지리산둘레길은 옛길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막걸리 한 사발 하면서 다리를 쉴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