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수철-성심원
경호강은 래프팅이나 카약으로 유명한가 보다. 강가에 래프팅이나 카약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가게들이 몇 군데 있다. 그리고 가로등의 모양도 다양한 각도의 카약을 하는 사람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 모양이 귀엽다.
지난번 5코스를 걸을 때 래프팅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거기서부터 물길이 이어진다. 그때는 임천이었는데 지금은 경호강이다. 같은 물길인데 어디는 임천이고 어디는 경호강이라는 것이 좀 우습다. 어쨌든 이곳은 강폭이 넓고 유속이 적당히 빨라 래프팅이나 카약을 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한다.
강을 끼고 걷다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무협영화에 이런 풍경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어떤 사물이나 경치를 보면 독특한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나의 경우 이 경치는 자동으로 무협 영화의 주제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아름다운 절벽 아래에 깊은 강물이 흐르고 그 절벽 위를 흰 옷을 입은 무협인들이 날아다니며 무공을 겨룬다. 크흐. 절벽 위를 날아다니기 좋은 경치다.
중간에 강변을 벗어나 약간 산 쪽으로 들어서는 구간이 있다. 가다 보면 길바닥에 이런 것도 보게 된다. 누군가 예쁜 낙서를 했다. 이 낙서를 찍은 것이 2014년이었는데 지금도 남아있을까? 궁금하다.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걸어봐야겠다. 이쯤부터 슬슬 오르막이 시작된다. 물론 아주 아주 약간 오르막이다. 지금까지 제법 걸어봤다고 이 정도 오르막은 가볍게 넘는다.
집이 몇 채 있는 곳을 지나 이런 개천을 징검다리로 건넌다. 물소리가 시원하다. 여름이라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그고 싶다. 주변에 농사를 짓느라 축대도 쌓고 개천에 돌도 가지런히 놓았다. 신발 벗고 들어가서 앉기 딱 좋은 구조다. 다음에 만약 여름에 온다면 꼭 발을 담그리라.
작은 오솔길을 지나다 보면 대나무 숲도 지나게 된다. 둘레길을 가다 보면 갑자기 대나무 숲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하도 많이 만나서 어디의 대나무 숲인지 혼동이 될 정도다. 기회가 되면 대나무 숲 사진만 따로 모아봐야겠다.
그리고 대나무 숲 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무협영화의 한 장면이다.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신들이 워낙 많아서 여러 장면들이 생각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위에서부터 검으로 대나무를 쪼개면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어느 영화인지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멋졌다. 오늘은 유독 무협영화를 많이 떠올리는 풍경이 많다.
이 대나무 숲을 넘으면서 바람재를 지난다. 그런데 왜 바람재 푯말 사진이 없는 거지? 아무래도 다시 바람재 사진을 찍으러 가야겠다.
개천을 지난 다음부터 중간에 다리를 쉴 곳이 없어서 좀 슬프다. 하늘도 우중충하다고 느끼는데 갑자기 저 멀리 햇살이 보인다. 사방이 어두운데 저곳만 해가 비치니까 신기하다. 일부러 조명을 비추는 것도 같다. 오늘 저 마을은 햇살의 축복을 받고 있다.
길은 다시 경호강변으로 이어진다. 저 바위 위에 흰 새가 앉아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니까 사라졌다. 타이밍이 늦었다. 중간중간 새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마다 놓친다. 멋진 새 사진을 찍는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포착을 잘하는 걸까? 그래도 경치는 여전히 멋지고 물소리를 시원하다.
드디어 성심원에 도착했다. 성심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로 종교시설이자 복지시설이다. 천주교에 기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59년에 개원했다고 하니 정말 오래된 곳이다.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오래전부터 노력해 왔다니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여기서는 청소년 교육도 하고 피정이라는 천주교 신자들의 수련교육도 한다.
길은 성심원의 위쪽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작은 규모의 지리산둘레길 산청센터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산청센터가 산청읍내 경호강 쪽으로 확장 이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아담했던 이 센터는 아직 유지되고 있을까?
사실 여기까지가 6코스의 종점이지만 이날은 다리가 멈추지 않았다.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는데 이 호젓한 산길을 계속 걷고 싶었다. 꿈속에서 걸었던 것처럼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그래서 걸었다.
아까 본 지리산둘레길 센터에 있던 고양이가 거의 재넘어 갈 때까지 따라왔다. 신기했다. 얘한테는 여기가 집 동네니까 밤이어도 무섭지 않았나 보다. 혹은 이 밤 중에 재를 넘은 사람이 걱정돼서 보호해 주려고 따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달빛만이 길을 비추어주는 길을 걸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는 구절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물론 여기는 메밀밭이 아니고 나무가 우거진 산길이다. 숲이 내뿜는 밤의 향기가 숨 막힐 듯 다가온다. 어두워지니까 청각과 후각이 더 선명해져서 오직 자연만이 숨 쉬는 공간을 숨죽여 걸어갔다. 잊지 못할 경험이다.
그렇게 해서 아침재(어천마을 입구)까지 걸었다. 물론 이런 짓은 매우 위험하다. 결국 밤중에 아침재에 도착해서 택시를 불러서 다시 수철마을로 돌아갔다. 이후는 다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이따금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 숲이 내뿜는 밤의 향기가 떠올라 마음이 설렐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