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하동호-삼화실
명사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멋진 정원이 있는 집을 지난다. 지난번에도 정원이 근사한 부잣집을 지나갔는데 여기가 규모가 더 큰 것 같다. 심어진 정원수들이 범상치 않다. 키가 큰 것은 싸이프러스인가 뭔가 하는 나무인 것 같은데 황금색 예쁜 나무는 뭔지 모르겠다. 정원도 넓고 나무도 근사하다. 이런 곳은 정원 관리하는 분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집은 너무 크고 관리도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살고 싶지는 않다. 대신 며칠 정도는 초대받아 머물고 싶긴 하다.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아침에 우아하게 커피를 들고 정원 산책을 하면 멋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명사마을은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다. 마을회관도 세 군데나 있고 탄소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특히 돌배가 유명하단다. 사실 돌배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보기 전에 길가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가 신기해서 찍었는데 이게 돌배였다. 돌배마을 인증이다. 갑자기 시원한 배가 먹고 싶어 진다.
명사마을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존티마을이다. 존티마을은 하존티, 상존티마을이 있단다. 상존티마을 경로당을 지나면 대나무 숲길이 나온다. 여기 대나무 숲은 지금까지 봤던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이곳의 대나무가 유명하다는데 이번에 지날 때 보니까 대규모로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나무 베는 기계 소리를 계속 들으며 걸어야 했다. 같은 길이라도 어느 시기에, 어떤 경험을 하면서 걷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대나무 숲길 중간에 개집과 먹이통이 여러 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용도일까? 첫 번째 추측은 야생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려는 것. 두 번째 추측은 동네가 가까우니까 고양이나 개에게 먹이를 주려는 것. 그런데 만약 야생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려는 의도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해서 야생 동물들의 먹이가 많이 줄어들었으니까 이렇게라도 동물들의 먹이를 챙겨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야생 동물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생존 능력이 생기는 것인데 이렇게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 근데 정말 어떤 용도일까?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 존티재를 넘는다. 여기에 둘레길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지리산둘레길 초창기에는 없던 스탬프북이 최근에 생겼다. 각 구간마다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요즘 둘레길을 역으로 돌면서 간간히 스탬프를 찍고 있다. 쭈욱 연결해서 걷지 않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걷는데 가끔은 스탬프북을 깜빡하고 와서 그냥 지나칠 때도 있다. 스탬프 찍는 곳이 차로 접근할 수 있는 길가에 있는 구간도 있고 어떤 곳은 이렇게 산 중에 있는 구간도 있다. 깜빡했을 때는 차로 지나가면서 다시 찍을 수 있는 곳이 좋다. 지금 여기는 고개를 넘으면서 찍어야 한다. 이번에는 잊지 않고 챙겨 와서 스탬프를 꾹 찍었다. 다행이다.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 슬슬 산책하듯이 내려가다 보면 쉼터도 나온다. 다리가 아프니까 쉬어가자. 이쯤에서 시원한 오이도 한 조각 먹는다. 그 맛이 아주 꿀맛이다. 가장 높은 재도 넘었고 이제는 룰루랄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이 바위는 이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 흙길이고 나무도 아기자기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다소 뜬금없이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울퉁불퉁하게 많은 구간이 아닌데 왜 여기에 얘만 홀로 있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밋밋할 수 있는 길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지금 저 위치에 바위가 없다면 풍경은 훨씬 심심해질 것도 같다. 같은 경치를 보고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지에 따라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깨닫는다.
흙길이 끝나고 잘 포장된 길이 나온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시멘트로 포장한 정성이 놀랍다. 그런데 가파르기가 범상치 않다. 도가니가 나가기 딱 좋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것도 시멘트로 포장된 딱딱한 길이라 더 심하다. 이럴 때는 터벅터벅 걸으면 안 된다. 사뿐사뿐 걸어야 한다. 옆으로도 걷고 뒤로도 걷고 삐딱하게도 걷고 똑바르게도 걷는다. 최대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걷는다.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멋진 집들을 몇 채 지난다. 멀리 마을과 평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한 집들이 부럽다. 집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시원할 것 같다. 이제 동촌마을로 접어든다. 동촌마을에는 아주 멋진 소나무가 있다.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나무다. 걷는 내내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멋있다.
드디어 삼화실에 도착했다. 삼화실이라는 지명은 옛날 삼화초등학교 주변의 세 개의 마을 이정, 상서, 중서를 합쳐서 부르는 것이란다. 삼화는 세 개의 꽃, 이정마을의 배꽃, 상서마을의 복숭아꽃, 중서마을의 자주꽃(오얏?)을 의미한단다. 세 개의 마을 꽃이 열매를 맺는 곳이 삼화실이다. 꽃피는 계절에 오면 특히 좋을 것 같다.
여기에 에코하우스가 있다. 에코하우스는 옛날 삼화초등학교 자리에 만든 삼화실 생태문화체험 공간이라는데 단체나 개별로 묵을 수 있는 숙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지리산둘레길 11코스에 해당하는 하동호-삼화실 구간을 걸었다. 2015년 사진을 날리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덕분에 다시 이 길을 걸으면서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으니 아주 나쁜 일은 아닌 듯하다. 이 구간은 커다란 호수에서 시작해서 강변을 지나 대나무 숲을 거쳐 꽃 피는 마을에서 끝난다. 굉장히 고르게 여러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게다가 별로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마을도 여러 곳을 지나고 마을마다 특산물도 다르고 풍경도 다르다. 둘레길의 특성을 잘 담고 있는 구간이다. 앞으로 이 구간을 또 걷는다면 가을에 와보고 싶다. 물은 깊어지고 숲도 짙어지고 열매는 탐스럽게 열리는 그런 계절에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