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서당(삼화실)-하동
관동마을을 향해 난 길을 산책하듯 걷는다. 그런데 여기 위험물 저장소라고 쓰여있는 구조물이 눈에 띈다. 무재해, 안전제일이라는 말까지 곁들여 있다. 그리고 구조물 안에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닭'들이 있다. 아마도 어느 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던 구조물로 닭장을 만든 거 같은데 아주 센스 있는 닭장이다.
어쩌면 닭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일 수 있다. 닭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가 아니라 닭이 없으면 인류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여기저기 세계를 여행해 본 나의 경험으로 보아 닭만큼 인간에게 사랑받는 가축은 없다. 소를 먹지 못하는 힌두교 지역에서도, 돼지를 먹지 못하는 이슬람 지역에서도 닭은 먹을 수 있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닭은 인간에게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되어 준다. 당장 치느님이 없다면 맥주는 어찌 마시랴. 아, 오늘 걷기를 끝내고 나면 치맥을 해야겠다. 위험물 저장소에 사는 닭을 위하여 건배.
관동마을을 지나 율곡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 넉넉한 정자가 있어서 쉬어간다. 멀리 너른 들판과 산이 보인다. 마을마다 이렇게 정자가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자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다. 마을 주민분들이 관리를 하시는 것이다. 간혹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정자들의 시계가 멈추어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는 점이다. 이 정자도 그렇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55분인데 시계는 7시 50분에 멈추어 있다. 저 높은 곳에 매달린 시계의 배터리를 누가 좀 갈아주어야 할 것 같다. 다음에 둘레길을 돌 때는 여분 배터리를 몇 개 들고 다닐까?
율곡마을을 지나 산으로 올라간다. 가다 보면 여러 채의 집 앞을 지나간다. 그중에는 숲 속에 자리한 작은 집도 볼 수 있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담한 황토집. 큰 정원이 아니라 작은 텃밭이 있고 주변 나무에 파묻혀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한 집. 그러면서도 살짝 높은 지대에 있어서 멀리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 그런 집이 좋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공사 중인 것이 보인다. 다음에 여기를 지나게 되면 풍경이 또 달라져 있겠구나.
올라간다. 힘들다. 전망이 좋다. 이 세 가지는 늘 붙어 다니는 조합이다. 다만 여기는 길이 험하지 않아서 힘든 정도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 덜 힘든 것에 비해 전망이 너무 근사하다. 가성비가 아주 좋은 구간이다. 살짝 흐렸던 하늘도 맑게 개고 있다.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걷다 보면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곳도 있고 둘레길 아님 표시가 있는 곳도 있다. 괜히 남의 땅에 들어가지 말고 가던 길을 잘 가자. 대부분 별다른 표시가 없으면 직진이다. 이 고개 이름이 바람재란다. 나의 닉네임이 바람이라 더 반갑다. 이 바람재는 하동 밤골과 적량 밤골을 이어주는 고개로 바람이 자주 부는 곳이라 바람재라고 한단다. 여기가 밤골이구나. 밤이 익는 철에 오면 더 좋겠다. 그런데 저번에 걸었던 수철-성심원 구간에서도 바람재가 있었다. 평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바람재라는 이름도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나무들이 나를 즐겁게 해 준다. 다소 민망해 보이는 쩍벌 나무와 그 나무의 한가운데에 서서 지긋이 바라보는 나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어떤 나무는 두 그루인지 한 그루인지 혼동스러운 것도 있다. 나무들 모양이 정말 제각각이다.
멀리 섬진강이 보이고 하동의 너뱅이들이 펼쳐진다. 너뱅이들이란 하동읍의 너른 들을 이르는 말이란다. 봄에는 보리밭, 가을에는 황금들판을 이룬다는데 지금은 애매한 계절이라 다소 밋밋하다. 넓은 들의 옛 이름인 너뱅이들이라는 말이 참 구수하게 느껴진다.
하동읍을 향해 내려가는 길이다.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진다. 저 멀리 학교 운동장인 듯한 것이 보인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하동중앙중학교라고 한다. 제법 산속으로 들어온 곳에 학교가 자리하고 있어서 신기하다. 이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등하교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살벌한 문구로 출입금지를 알리는 것도 보았다. 절대 가지 말자.
하동읍에 거의 다 왔다. 커다란 바위 아래에 다소곳이 자리한 벅수가 반갑다. 아직은 조금 더 내려가야 하지만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여기서부터는 남의 밭두렁을 지나 마을로 들어선다. 여기서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를 자랑하는 소나무를 보았다. 장딴지가 씨름선수 같은 소나무이다. 두 그루가 나란히 다정하게 붙어 있다.
이제 하동읍내로 들어선다. 높은 건물도 보이고 차소리도 들린다. 갑자기 속세로 돌아온 것을 실감한다. 구불구불한 동네 골목길을 내려가면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둘레길 정보도 얻어가고 지도도 구하자. 최근에 서당-하동 구간의 둘레길 일부가 변동되었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출발점을 하동으로 삼는다면 여기 들어서 현지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하동센터에서 내려가면 큰 도로가 나오고 거기에 영화관, 버스 터미널, 숙박시설, 각종 상점 등이 있다. 그리고 제법 큰 규모의 하동 시장(2. 7일장)도 있어서 여기에 숙소를 정하면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삼화실에서 시작해서 하동으로 걸어왔다. 이제는 지리산둘레길 종주의 중반을 지나면서 어느 정도 능숙한 둘레꾼이라는 자만에 빠져서 내 맘대로 길을 구성하여 걸었다. 삐뚤어질 테다라고 마음먹었지만 둘레길을 걷는 동안 그다지 삐뚤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소소하게 막걸리를 마셨고 친구와 담소를 나누었고 산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마을을 지났고 숲길도 건넜고 다양한 풍경을 만났다.
그냥 둘레길은 그런 것 같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특별할 것도 없고 그래서 그다지 삐뚤어질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둘레길 걷기가 왜 좋은 걸까?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 드는 생각은 걷는 동안 보이는 다양한 풍경이 좋고 그 사이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좋은 거 같다. 때로는 낯선 마을, 낯선 경치가 나타나고 때로는 익숙한 길, 익숙한 쉼터가 나타난다. 낯설면 낯선 대로 익숙하면 익숙한 대로 좋다. 함께 걸으면 수다를 떨면서 걷고, 혼자 걸으면 사색에 잠겨 걷는다. 그렇게 걷고 생각하는 것이 둘레길 걷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