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삼화실(서당)-대축
지리산둘레길 삼화실-대축(12코스) 구간은 총 16.7킬로다. 전체 구간 중에서 세 번째로 길다. 1등은 인월-금계(20.5), 2등은 오미-난동(18.9)이다. 하지만 둘레길의 난이도는 길이보다 고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걸으면서 깨닫는다.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에서 인월-금계의 난이도는 '중', 오미-난동의 난이도는 '하' 그리고 삼화실-대축의 난이도는 '상'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아주 정확했다. 한동안 빨라졌다고 생각했던 나의 걸음은 다시 느려졌다. 역시 난이도 '상'에서는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빨리 가는 게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끝까지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겁게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느린 걸음으로 이번 구간도 즐겁게 걷는다.
지난 편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삼화실-대축 구간과 서당-하동읍 구간을 내 맘대로 설계해서 걸었다. 삼화실에서 출발해서 서당을 거쳐 하동읍까지 걸었고 그다음 날 서당에서 출발해서 대축까지 걸었다. 서당에서 대축까지는 13.2킬로 정도 된다. 보통 삼화실에서 대축까지 16.7킬로를 7시간 정도 잡는데 나는 3.5킬로를 뺀 구간을 걷는데도 7시간이 걸렸다. 오르락 내리락이 좀 있어서 오랜 걸린 것 같다. 만약 삼화실에서 대축까지 갔다면 9시간 이상 걸렸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전날 삼화실에서 서당까지 미리 걸은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신의 한 수였다. 가끔은 인생을 삐뚤어지게 살 필요도 있는 것이다.
교통편은 하동읍에서 대축까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두 대 정도 있으므로 이걸 이용하면 좋다. 다만 서당이나 삼화실은 하루에 서너 번 정도 버스가 다니므로 여기는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다.
먹거리는 삼화실, 서당, 대축. 모두 식당이 없다. 그나마 대축에 아주아주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다. 물과 점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
숙소는 삼화실 에코하우스가 지금도 운영하면 이용할 수 있고, 대축마을에도 민박이 있다는데 나는 찾지 못했다. 민박이나 교통편은 실제로 전화로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상황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제 쉬었던 서당마을 삼거리 정자에서부터 대축 방향으로 출발한다. 한동안은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한다. 지나는 차는 별로 없지만 인도가 따로 없어서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그늘도 없다. 없는 게 참 많다. 아무리 한적한 시골의 도로라고 하더라도 도로를 처음 설계할 때부터 인도를 필수로 넣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한 사람이라도 걸을 때 위험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런 길은 가로등도 없기 때문에 밤에는 더욱 위험하다. 모든 도로에는 인도를 꼭 넣자.
아스팔트길이 곧 끝나고 우계(적량)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둑길을 가로질러 건너게 되는데 그 입구에 간이 화장실과 쉼터가 있다. 아직 쉴 정도로 많이 걷지는 않았지만 반가운 나무 그늘이라 잠시 쉬어간다. 저수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다.
저수지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산은 벌써 초록빛이고 물에 비친 산과 하늘도 푸르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산과 하늘, 구름은 곧 여름이 될 거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산의 능선들도 예쁘다. 그러고 보니 산들도 제각각 모양이 다르구나. 둥근 애, 뾰족한 애, 두루뭉술한 애, 울퉁불퉁한 애 등등. 산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곡선도 눈여겨봐야겠다.
저수지 쪽만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저수지 아래쪽을 바라본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쪽 경치도 예술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정겨운 논두렁, 밭두렁이 펼쳐지고 소복이 자리한 마을이 보인다. 그리고 멀리 병풍처럼 둘러선 산들까지 한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에 보이는 비닐하우스가 좀 거슬리지만 탁 트인 전망이 시원스럽다. 그런데 내가 비닐하우스에 대해 투덜대니까 같이 걷는 친구가 한 마디 한다.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요즘 우리가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아, 그렇긴 하다. 사진을 찍을 때 비닐하우스가 포함되면 예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투덜거렸는데 비닐하우스 덕분에 겨울에도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아야겠다.
저수지를 따라 좁은 오솔길을 걷는 것이 좋다. 온통 세상이 초록초록하다. 풀내음도 좋고 그늘도 시원하다. 그렇게 걷다 보면 저수지 위쪽에 있는 마을인 괴목마을이 나온다. 괴목마을에서부터 블루베리 묘목을 많이 보았다. 그게 블루베리 묘목인지 내가 구분할 리는 없고 농원 푯말을 보고 알았다. 중간에 블루베리 밭 사잇길도 지나는데 길을 허락해 주신 마을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 벌써 이만큼 올라왔다. 올라오는 과정은 힘들지만 경치는 더 좋아진다. 아까 지나온 우계 저수지도 보인다. 적당한 위치에 정자도 있어서 내려다보면서 쉴 수 있다. 이제 길은 신촌마을로 이어진다. 저 멀리 보이는 신촌마을은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마을인데 1700년경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니 유서 깊은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이 깊은 산골, 이 높은 곳까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신촌, 즉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1700년경에 이 마을은 새로운 마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래된 유서 깊은 마을이 되었다. 갑자기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생각난다. 여기 높은 곳에 오래된 새로운 마을이 있다.
감꽃 발견! 먹는 감은 많이 봤어도 감꽃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까 소담하고 귀엽다. 화려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수줍은 듯 자리한 아기 감꽃을 보니까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색깔도 초록색 잎과 어우러져 은은한 노란빛을 띠고 있다. 지난번 걸었던 위태-덕산 구간에도 지금 감꽃이 한창이겠구나.
작은 오솔길을 벗어나 아스팔트길을 만난다. 신촌마을로 진입하는 도로이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신촌마을에 도착했다. 아까의 그 저수지는 벌써 저만큼 멀어졌다. 신촌마을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이 정자 옆에 오래된 방앗간터가 있다는데 나는 경치에 정신이 팔려서 보지 못했다. 역주행으로 다시 걸을 때 살펴봐야겠다. 방앗간터를 보지는 못했어도 이 경치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 오래된 마을의 새로운 발견이다. 여기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