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삼화실(서당)-대축
신촌마을에서 다시 길을 나선다. 계속 오르막이다. 길가에서 아주 힘센 나무를 보았다. 바위를 쪼개는 중이다. 아주 서서히. 정말 놀랍다. 누가 그랬는데, 지구는 식물이 지배하고 있다고. 인간이 아무리 까불어봤자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을 지나갈 뿐이고 식물이 오랫동안 이 지구의 주인으로 지구의 생태계를 좌우하고 있다고 했다. 저 나무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날아든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면서 서서히 뿌리를 뻗어내려 가면서 바위를 쪼갠다. 아, 바위를 쪼개는 중인 걸까? 아니면 바위와 공생하는 걸까? 그 결말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겠지.
오르막이지만 잘 닦인 임도를 걸어가서 험하지는 않다. 다양하게 구부러진 길을 간다. 급하게 구부러진 길도 있고 아주 서서히 구부러진 길도 있다. 산줄기를 휘감아 도는 길들을 걷다 보니 문득 누가 처음 이 길을 내었을까 궁금해진다. 누군가 이곳을 걸어갔고 그렇게 걸어간 발자국들이 모여서 하나의 길이 되었을 것이다. 지리산둘레길은 대부분 오래전부터 이곳 주민들이 이웃 마을로 가기 위해 다녔던 길들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누가 왜 이 높은 산을 넘어가기 위해 처음 길을 내었을까? 신촌마을이 1700년경에 생겼다고 하니까 아마도 그때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저 넘어 어느 마을로 가기 위해 이 길을 걷지 않았을까? 상상의 날개를 펴 본다.
아까 본 저수지 풍경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멀리 우계 저수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갑자기 너무 반갑다. 이렇게 보니 제법 높은 산을 타고 있음을 실감한다. 주변의 다른 산들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숨 가쁘게 올라온 만큼 역시 경치는 끝내준다.
신촌재를 넘으면 짧은 흙길 구간이 나오고 이어서 다시 포장된 임도를 만난다. 어느 구간은 나무가 울창하여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임도는 바로 이런 길이다. 나무가 우거진 산속에 놓은 도로. 그게 임도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게다가 누군가 센스 있게 여기에 의자도 설치해 놓았다.
숲 속 임도 구간을 벗어나면 간간히 집들이 보인다. 전원주택 단지로 개발되고 있는 곳이다. 이 깊은 산골에 전원주택 단지가 생긴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곳을 지나면 어느새 먹점마을이다. 둘레길은 마을을 관통하지는 않고 먹점마을을 바라보면서 스쳐 지나간다. 검색해 보니 먹점마을의 지명은 예전 기록에 '묵점'으로도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먹'을 생산하던 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단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민이 매실농사를 지어서 봄에는 매화꽃이 만발하다고 한다. 매화꽃은 2월 말에서 3월 중순에 핀다고 하니까 이 시기에 한번 이쪽 길을 걸어봐야겠다. 먹점마을을 지나는 길가에 평상이 시원하게 자리하고 있다. 평상이 제기능을 발휘하도록 아주 편히 쉬어주고 간다. 누워서 먹점마을 쪽을 바라보면서 매화꽃이 피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다.
다시 길을 나서면 나무 그늘이 별로 없는 임도를 올라간다.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다 보면 먹점마을이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있다. 여기서 보니까 저기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정작 그 아래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저 소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지켜주는 것 같다. 나무도 쳐다보고 멀리 경치도 보면서 걷다 보면 먹점재에 도착한다. 이번 구간의 마지막 고개이다. 하지만 잘 포장된 길을 따라 통과하기 때문에 고개를 넘는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힘들이지 않고 먹점재를 넘어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멀리 섬진강과 평사리가 보인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날씨가 맑았으면 더 멋졌을 것 같다. 저 평사리가 바로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아직 전체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딱 봐도 너른 들판으로 보인다. 게다가 섬진강.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한동안 섬진강을 따라 구례 방향으로 걸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안 그래도 좋아하는 둘레길이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다.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간다. 내려가다가 평상을 찾지 못해서 길바닥에서 잠시 쉬어간다. 내 못생긴 발에게 근사한 섬진강 풍경을 선물한다. 발은 나를 이 멋진 곳으로 인도하지만 정작 자신은 경치를 즐기지 못한다. 그러니까 가끔은 이렇게 고생한 발에게 시원한 바람과 멋진 경치를 느끼게 해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사람들이 많으면 부끄러우니까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길은 미점마을을 스치듯 지나면서 다시 숲길로 이어진다. 폭신한 흙길과 반가운 나무 냄새가 반긴다. 나무 그늘을 만끽하면서 걷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길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않는다. 길은 다시 포장된 임도로 바뀐다. 하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발걸음은 가볍다. 숙제를 다 끝낸 느낌이다.
이제 거의 다 왔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 멋들어진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문암송이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마치 바위에 걸터앉은 것 같은 모양으로 자란 소나무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령이 600년 정도로 추정된단다. 이 아름다운 소나무와 너른 들판, 섬진강의 모습이 어우러져 수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모여들어 문암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문득 아까 신촌마을을 지나서 본 바위를 쪼개는 소나무가 생각났다. 그래, 아까 본 그 소나무가 600년 정도 지나면 이런 모습으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바위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혹은 바위를 품고 있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겠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오랜 세월을 지낸 이 소나무가 이제 막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겠구나. 우리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무들끼리 교감을 나눈다면 아마도 이 두 소나무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나무로부터 새로운 나무에게로.
대축마을에 도착했다. 대축마을은 대봉감의 시배지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대봉감 축제도 열린다고 하니 가을에 이 길을 걸으면 대봉감이 익는 모습도 보고 맛있는 감이나 곶감도 먹을 수 있겠다. 말랑말랑한 대봉감을 상상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정말 고백하건대 나는 과일 중에 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둘레길을 걸으면서 생각이 바뀌고 있다. 고사리도 그렇고 매실도 그렇다. 길을 걸었을 뿐인데 내가 변하고 있다. 기분 좋은 변화이다.
오늘은 장장 7시간을 걸었다. 서당마을에서 오전 10시쯤 출발했는데 대축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다. 오래 걷기도 했지만 이번 길에서는 오래됨과 새로움이 교차하는 경험을 많이 하였다. 오래된 마을인 신촌마을도 생각나고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은 문암송과 새로 뿌리내린 소나무도 생각난다. 그리고 지나온 마을들, 괴목마을, 먹점마을, 미점마을도 생각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해서 짧은 순간의 풍경만 볼 수 있지만 우리가 간 후에도 오래된 것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로운 인간이 이 풍경을 보고 감탄하겠지. 이렇게 늘 오래됨과 새로움은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