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넓은 벌 서쪽 끝으로(1)

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대축-원부춘

by 바람

세상 일에는 예상 밖의 변수가 항상 존재한다. 2015년 6월 연휴를 기다려 지리산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길을 재촉하여 왔건만 비는 야속하게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비가 곧 그칠 것이라는 예보와 서서히 개어가는 하늘을 믿고 잠시 기다려 본다. 그냥 기다리기는 심심해서 근처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해 보니 근처에 '쌍계사'라는 절이 있다.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유명한 절인가 보다. 그야말로 고즈넉한 절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산책하고 있노라니 드디어 비가 그친다. 아직 구름이 낮게 드리웠지만 그래도 지리산둘레길을 시작할 수 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지리산둘레길13코스.jpg 지리산둘레길 대축-원부춘 구간(네이버지도)


대축-원부춘 구간(13코스)은 평사리 들판을 순환하는 코스까지 포함하면 10.2킬로, 그냥 대축에서 원부춘으로 가면 8.5킬로 정도 된다. 평사리 들판을 지나는 길 빼고는 계속 산길 오르막에 제법 높은 재를 넘기 때문에 난이도는 '상'이다. 순환코스를 빼고 보통의 소요시간을 4시간 30분 정도 잡는데 내 걸음으로는 약 6시간 정도 걸렸다. 난이도가 '상'인 것도 원인이지만 비가 온 다음이라 미끄러질까 봐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느라 오후에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루에 원부춘까지 가기는 무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첫째 날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대축마을에서 평사리문학관, 입석마을 거쳐 다시 대축마을로 돌아오는 순환코스(약 7킬로)를 걸었고, 둘째 날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입석마을에서 원부춘(약 6킬로)까지 걸었다.


교통편은 대축마을에는 하동읍에서부터 버스가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원부춘은 하루 한 대 정도 다니는 농어촌 버스만 있다. 대축과 원부춘을 곧장 이어주는 버스는 당연히 없고 하동을 거쳐야만 한다. 대축마을 버스정류장 쪽에 주차장은 아니지만 공터가 있어서 차를 세워둘 수는 있다. 다만 너무 많은 둘레꾼들이 차를 세워두면 마을 분들이 싫어하실 수도 있겠다. 원부춘 쪽에는 차를 세워둘 만한 공간이 없다.

먹거리는 평사리 문학관에 들른다면 거기에는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점심과 물을 잘 준비하자.

숙박은 대축마을에 민박이 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입석마을에도 민박집이 하나 있다. 원부춘에는 펜션이 제법 있다. 참, 평사리 문학관에도 숙박시설이 있다.




IMG_8111.JPG
IMG_8113.JPG
대축마을에서 평사리 들판으로

오후 1시에 대축마을을 출발한다. 아직은 하늘이 꾸물꾸물거린다. 그나마 비를 그쳐준 것에 감사한다. 내 걸음으로 지금부터 원부춘까지 가려면 엄청 달려야 한다. 그러지 말자. 즐기면서 걷자. 오늘은 평사리 순환코스만 돌기로 마음먹고 마음껏 여유를 부린다. 역시 유유자적 걷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IMG_8115.JPG 비가 그친 평사리 들판

비는 그쳤지만 구름은 산허리에 걸터앉아 있다. 모내기를 끝낸 평사리의 논들은 정갈하다. 어쩌면 모들이 저리도 가지런할까? 하늘이 구름 때문에 더 낮게 드리운 것 같고 땅은 파릇파릇한 모 때문에 한껏 들뜬 것 같다. 하늘과 땅이 좀 가까워진 것 같고 나는 한 폭의 풍경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IMG_8116.JPG 평사리 들판의 보리밭

그런데 가을도 아닌데 황금물결을 이루는 곳이 있다. 농알못(농사를 알지 못하는)인 나는 이것이 밀밭인지 보리밭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물어보고 싶은데 길가에 사람이 없다. 검색의 힘에 의존해 보니 보리밭인 듯하다. 지금 이 계절에 보리밭이라니 좀 생소하다. 보리는 원래 이른 봄이 제철 아닌가? 어쨌든 너른 들판의 갈색 물결이 장관이다.




IMG_8125.JPG 평사리 들판과 두 그루의 소나무

갈색의 보리밭과 청색의 논이 어우러진 사이로 두 그루의 멋들어진 소나무가 마주 하고 있다. 소나무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그저 소나무는 묵묵히 서 있을 뿐.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을 소설 '토지'의 서희와 길상이 소나무라고 여겨 '부부송'이라고 부른단다. 무어라 부르건 간에 평사리 들판이라는 무대에서 이 두 소나무는 주연인 듯하다. 그러면 보리밭과 논은 조연인 걸까? 그러면 저 뒤의 산은 무대장치? 구름은 무대 장막? 아, 상상의 날개가 너무 멀리까지 갔다.



IMG_8128.JPG
IMG_8132.JPG
동정호와 최참판댁 버스 정류장

평사리 들판을 건너 서쪽으로 가면 제법 큰 규모의 호수가 있는데 그 이름이 '동정호'란다. 설마 중국의 그 '동정호'? 맞단다. 이곳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인데 '악양'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악양'이라는 지명과 같다고 하여 그곳의 호수 이름을 본떠 '동정호'라고 했단다.

지리산둘레길은 이 '동정호'에서 우회전하여 들판을 가로질러 입석마을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오늘 평사리 문학관을 향해 직진하여 둘레길을 좀 벗어나본다. '동정호'에서 도로를 건너면 최참판댁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여기서 평사리 문학관을 향해 오르막길을 오른다.



IMG_8160.JPG
IMG_8159.JPG
평사리 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

그런데 생각보다 한참 올라간다. 만약 둘레길을 돌다가 잠깐 들를 생각이라면 그게 잠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참고하길 바란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가에 예쁜 카페들도 있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가게들도 있어서 심심치는 않다.



IMG_8146.JPG
IMG_8138.JPG
IMG_8137.JPG
드라마 '토지' 세트장

평사리 문학관 옆에는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토지' 세트장 옆에 평사리 문학관이 있다. 한참 인기를 끌던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 지어진 후에 이곳에서 토지 문학제 등의 행사를 하면서 문화 관광지로 인지도를 높이게 되자 평사리 문학관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드라마 세트장이 뭐 별게 있겠어라고 생각하고 둘러보았는데 생각보다 잘 꾸며져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무래도 '토지' 드라마를 보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러느라 정작 평사리 문학관은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IMG_8168.JPG
IMG_8170.JPG
감나무와 아기 감

평사리 문학관과 토지 세트장에서 조금 내려오면 입석마을로 질러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둘레길이 아니라 길안내판은 없다. 그냥 지도를 보고 확인하면서 걷는다. 길가에 감나무들이 제법 많이 있는데 감꽃들이 어느새 아기감이 되었다. 너무나 앙증맞은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가들아, 무럭무럭 잘 자라렴.



IMG_8172.JPG
IMG_8171.JPG
입석마을 가는 길

평사리 들판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걷는다. 평사리 들판이 있는 동쪽은 구름이 어느새 걷혀 푸른 하늘도 제법 보인다. 그런데 내가 향하고 있는 서쪽은 아직도 구름이 산 중턱에 걸려있다. 같은 하늘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니 신기하다. 내일은 부디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입석마을까지 농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 삼거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다시 평사리 들판으로 내려선다.




IMG_8175.JPG 평사리 들판의 수목들

대축마을로 돌아오기 위해 평사리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런데 아까 본 풍경과는 다른 들판의 모습도 보인다. 논이나 밭이 아닌 과수원을 보게 된다. 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감나무도 있는 것 같고 다른 수종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논농사나 밭농사만으로는 농가 소득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이렇게 품목을 다양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네모 반듯한 들판에 논과 밭, 과수원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이렇게 다시 한 바퀴 돌아 대축마을로 돌아와 오늘의 걷기를 끝낸다. 내일은 입석마을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하여 원부춘까지 걸을 것이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래된 새로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