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대축-원부춘
둘째 날 아침 9시, 다시 입석마을로 돌아와 출발한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개었다. 너무 신난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제법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잘 닦인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시골의 아침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밭일을 마친다. 그래서 내가 출발할 때쯤이면 이미 밭일을 마친 어르신들이 집으로 향할 때쯤이다. 밭에서 만난 할머니들이 묻는다.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오느냐'라고. 그러면 내 대답은 늘 '그냥 지리산이 좋아서요'이다. 그냥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으랴.
길가에 아주 예쁜 연두색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설마 돌나물? 근데 돌나물도 꽃이 피나? 꽃검색을 해보니 돌나물꽃이란다. 우와! 신기하다. 초고추장에 무친 돌나물은 먹어봤어도 꽃이 피는 줄은 몰랐다. 하긴 감꽃도 처음 보았지? 지리산둘레길은 그 자체가 생태학교다. 돌나물꽃도 감꽃과 마찬가지로 화려하지 않고 소담하고 어여쁘다.
길은 곧 평사리 들판을 등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다. 걸어보니까 어제 무리하여 진행하지 않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비 온 뒤라 길도 질고 숲이 우거져 어둡다. 시간도 꽤 많이 걸렸는데 만약 해가 진 다음에 이 산속을 걸어야 했다면, 게다가 랜턴도 준비 안 한 상태에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갑자기 하얀 꽃길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 작고 하얀 꽃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 꽃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 어여쁜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려니 기분이 묘하다. 누가 이 깊은 산속에 작은 별들을 흩뿌려 두었을까?
본격적인 오르막 산행 구간이라 많이 힘들다. 그래서 수시로 쉬면서 간다. 그런데 깊은 산 속이라 그런지 쉼터가 거의 없다. 대충 바위에도 걸터앉고 땅바닥에도 앉아서 쉰다. 정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의자라도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래도 숲 속 길이라 시원하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 폐 속까지 정화되는 것 같다. 비가 온 뒤라 공기가 더욱 청명하다.
오르막 중간에 능선을 끼고 걷는 길도 나온다. 이런 길은 걷기도 좋은 오솔길이고 시야도 트여서 좋다. 겹겹이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가 보인다. 산 뒤에 산이 있고 그 뒤에 또 산이 있다. 그 와중에 소나무는 멋진 액자 역할을 하고 있다.
잠시의 능선길을 뒤로하고 너덜길이 시작된다. 바위가 흩어진 비탈길. 걸음을 조심해서 내딛지 않으면 발목을 다치기 쉽다. 스틱이 있어서 다행이다. 조심조심 걷는다. 그런데 길 중간을 막고 있는 나무가 있다.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저절로 겸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지나고 보니까 나무뿌리가 뽑혀 누워있다. 아이고. 어쩌다가. 아직까지는 살아있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버틸까 싶다. 안타깝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무들에게도 각각 개성이 있다. 이번에 만난 나무 친구는 아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것 같다.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제멋대로 뻗어있다. 그래서 내가 '방방나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 방방이는 성격이 좋은 것 같다. 방방이 나뭇가지가 다른 나무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걸치기도 하는데 참 신나게 잘 뻗어 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저 멀리 보이는 바위는 거인이 살짝 밖을 내다보는 것 같다. 북유럽 전설에 트롤이라는 거인 괴물이 나오는데 그 트롤이 밖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내다보는 것 같다. 내 눈이 이상한 걸까?
한참 동안 거친 내리막 산길을 걷는다.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교차하지만 분명 내리막길이 맞다. 언제쯤 도목적지에 도달할지 궁금해질 무렵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면서 커다란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위에는 쉬어갈 수 있는 평상도 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해서 나타난 쉼터다. 바위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작은 암자가 있고 마을 가는 길로 이어진다. 이제 산길은 끝이다.
풍요롭고(富) 따뜻한 봄날(春) 같은 동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원부춘마을에 도착하니 햇살 가득 정말 풍요롭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다소 힘들었던 여정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면 좋은데 나는 이날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서 더 걸어서 중촌마을까지 갔다. 그래서 이후 한동안 코스를 애매하게 걸었다. 욕심을 부리면 그리 된다.
그리고 작은 팁 하나. 나는 이 코스도 두 번 갔는데 한 번은 6월, 한 번은 7월이었다. 초보 친구들과 함께 걸은 7월은 한여름 뙤약볕을 걷게 되는 것을 감안하여 원부춘에서 대축마을로 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을 태우고 오느라 늦어져서 오후 1시 30분에 원부춘에서 출발했는데 완전히 더운 한낮에는 산속 길을 계속 걸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입석마을에 도착했다. 지는 해를 등지고 평사리 들판을 느긋하게 걸어서 대축마을에 도착한 것이 7시 30분이었다. 해가 긴 한여름에는 그렇게 가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